1925년 4월 4일

한 달 9끼도 못하는 비참한 농촌생활
수해와 한해, 초근목피로 생명 연명해

  

 

 
“二千萬의 八割 以上의 多數를 點領한 農村 同胞의 生活은 無理한 地主의 搾取를 當하여 裕足生活을 하지 못하고 年年히 도리어 衰頹하여감을 免치 못하는 現狀인 바, 더욱이 雪上加霜으로 空前 旱水虫 被害로 因하여 戰慄할 饑饉과 恐怖에 쌓여서 男負女戴하고 故國을 등지고 山異水異한 海外로 彷徨하며 生活을 絶叫하는데 諸君은 安樂한 春夢에 醉하여 듣지 못하는가? (중략) 諸君아, 奮起하리라. 二百萬 同胞를 爲하여서 萬一 諸君이 秋毫의 槪念이라도 있거든 다른 곳은 그만두고 振威의 農村同胞의 生活現狀을 實際보아라. 그 慘狀이 어떤가를. (중략) 三旬九食을 못하고 草根 새싹 올밤대를 探取하며 生命을 連하여 가는 同胞가 幾百幾千이며 餓死의 地境에 處하여 四五日間式 粟粥도 먹지 못하여 命在遲刻인 同胞가 그 얼마인가!(曹喜哲)”(동아일보, 1925년 4월 4일자)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이 발달해 자연재해로부터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지진이나 태풍·수해·한해 등은 여전히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해와 한해 등으로 궁민(窮民) 즉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1924년은 한해와 수해·설상가상으로 병충해까지 겹쳐 이재민의 생활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초근목피로 ‘쌩똥’을 쌀 수밖에 없는 그런 생활이었다. 극빈한 이재민인 농촌 동포들이 늘어나자 뜻 있는 유지들이 ‘조선기근구제회’를 조직, 동정금 즉 의연금을 모집해 나눠줬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평택에서는 반응이 전혀 없었던 듯하다. 평택은 수도권 남부에서 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농민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 농민들은 수해나 한해를 당하면 바로 궁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평택의 농촌 궁민은 ‘삼순구식(三旬口食)’ 즉 한 달에 9끼를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심지어 굶어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기근구제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구제하지 못하고 남의 일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에 조희철이라는 청년이 분기해 <동아일보> 독자투고란인 ‘자유종’에 기고했다.

“평택의 유지들이여! 굶어죽은 농촌 동포를 위해 구제회를 조직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구제사업에 힘쓰라”

이와 같은 호소에 부용면(현 팽성읍) 추팔리 최종하·오춘삼·김춘백·김춘식·정성조·이치홍 등이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만주산 조를 공동으로 구입해 목동의 어려운 가정을 도왔다. 그러나 결국 평택에는 기근구제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슴을 울리는 조희철의 호소문에도.

조희철은 이 글을 투고할 당시 평택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1926년 8월 10일 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로, 1928년 2월 25일 시흥지국장에 취임했다가 1929년 8월 23일 사임했다. 1931년 2월 14일 중앙기보사에서 주최하는 농촌문제강연회에서 ‘피로의 원인과 그 대책’이라는 강연을 한 바 있고 이해 가마니를 짜는 기계를 발명, 대서특필됐다. 이외에도 노청학원·동아제면소·동아양봉원·동아장유양조소·중앙기보사 등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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