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간 한글강습회, 브나로드운동 전개
정식교원 아니라고 평택경찰 중지명령

 

 
“지난 八월 一일부터 경부선 평택(平澤) 역전에 있는 진청야학원(振靑夜學院)을 빌리어 약 八일간 예정으로 一백여 명의 아동을 모아 한글강습을 개시한 바, 앞으로 二일간만 더 계속한다면 마치게 되는데, 六일에 와서 돌연히 평택경찰서에서 중지명령을 내리었으므로 소기의 요망을 달치 못하고 동 강습회는 드디어 해산을 하고 말았다.

그 책임 대원인 이영식(李英植) 서병림(徐柄林) 양군은 당지 무산아동 교육기관인 진청야학원에 선생이었던 바, 그 후로부터는 동 야학원 선생의 책임까지도 정식교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중지를 당하여 수백 아동에게 적지 않은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동아일보, 1932년 9월 10일자)

‘브나로드’란 원래 러시아 말로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브나로드운동(V narod運動)은 1930년대 초에 일어났던 한국의 학생운동으로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이었다.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전국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는데 제3회까지는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해서 제4회부터 ‘농촌계몽운동’으로 바꿨다.

1931년 <동아일보사>에서는 농촌의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고 농촌 계몽운동을 준비한다. 이는 농촌에도 소학교와 중등학교를 세우고 나이가 많은 고령자와 장년층을 위해 야학을 설치해 글과 숫자를 깨우치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한편 1930년 이후 서울을 비롯한 지방 각 학교에서는 동맹휴학 등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고 날이 갈수록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감시는 심해갔는데 이 무렵 새로운 학생 운동으로 등장한 것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그러나 브나로드운동은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처로 계속하지는 못했다.

브나로드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됐는데 평택에서도 1932년에 전개됐다.

평택역 앞에 있는 진청야학원의 선생이었던 이영식과 서병림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 100여 명을 모아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8월 1일부터 8일까지 8일간 예정이었던 한글강습회는 6일 동안 잘 진행됐는데 7일째 되던 날 평택경찰서에서 강습회를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이어 한글강습회를 강제로 해산했다. 이로 인해 한글강습을 받던 학생 100여 명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강습회를 해산한 이유는 한글을 가르치는 이영식과 서병림이 정식교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영식과 서병림은 이미 진청야학원에서 교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한글교육을 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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