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8월 7일
일본인이 경찰이라고 사칭해 조선인 하대
심상소학교 교장 요시무라 안하무인 행위

  

 
“지난 칠일 오전 열시 경에 평택경찰서에서는 본적을 평택에 두고 현재 경성 모 학교에 재학 중인 이종호(李鍾浩, 20)란 학생을 취조 중이라는데, 그는 전날 밤에 당지 삼현길(森賢吉)이라는 일본인 주최로 활동사진을 본 경찰서 구내에서 개최하게 되어 활동사진을 구경하던 바, 어떤 일본인이 그 학생이 구경하는 뒤에다가 의자를 놓고 앉으며 단장으로 학생을 꾹 지르며 비키라고 (중략) 서러운 말을 하며 취조하였다는데, 일반은 그 사실에 대하여 단장으로 사람을 찌른 것은 너무도 하대일 뿐 아니라 경찰에 태도가 하대를 하는 사람은 아무 말도 않고 하대를 받지 않겠다는 학생에게는 그와 같이 때린다는 것은 너무도 무리하다 하여 비난이 자자하다고 한다”(조선일보, 1930년 8월 10일자)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은 무척이나 척박했다. 식민지인으로 산다는 것은 차별 그 차체였다. 일본인은 1등 국민이고 조선인은 늘 2등 국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식민지 모국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것도 차별을 받으면서. 이러한 가운데 일본인과 같이 대접을 받으려고 친일 내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이를 이른바 ‘친일파’라고 한다. 이들 친일파 외 식민지인은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엄연한 차별 속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독립’과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염원하고 이를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일제의 차별은 평택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경부선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일본인들이 점차 늘어났고 평택역을 중심으로 일본인촌 즉 ‘왜인마을’이 생겨났다. 이들은 당시 권력자로 행세했다.
1930년 8월 7일, 평택에서 서울로 유학한 이종호라는 학생이 방학을 이용해 고향으로 돌아와 활동사진을 관람하고 있었다. 지금은 영화를 볼 기회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활동사진전 등이 많았다. 마침 평택의 유지이며 일본인 모리(森賢吉)가 평택경찰서 구내에서 활동사진전을 개최했던 것이다. 이종호가 활동사진을 구경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지팡이로 등을 쿡 찌르며 비키라는 것이다. 다름 아닌 심상소학교 교장 요시무라(吉村)였다. 요시무라는 의자에 앉아서 활동사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종호는 ‘건방지게 지팡이로 사람을 콱콱 찌르느냐’고 일본말 아닌 우리말로 항의를 했다. 그러자 일본인 여러 명이 이종호에게 달려들었고 이종호의 친척 되는 서용달이 ‘왜 그러느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요시무라는 자신이 경찰이라고 하면서 공무집행 방해 죄목으로 이종호를 경찰서로 끌고 갔고 이유 없이 이종호를 때렸다. 이종호가 항의하자 요시무라는 ‘학생들에게 칠판 가르치는 습관’으로 지팡이로 찔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무집행 방해는 징역 3년 이상이라고 위협을 주었다. 그런데 요시무라는 경찰이 아닌데도 경찰이라고 사칭했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