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은 백제의 혜군 가리저에 속했고
신라 때 객관을 두어 사신과 상인들이 이용했으며
신라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갈 때 경유했다

 

 
▲ 포승읍 만호리와 앞바다 전경(1970년대)

만호리에는 조선수군이
주둔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만호'라는 지명이 그렇고
폐동된 만호4리에는
'원터'라는 지명도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원기'마을도 있었다.
만호리 일대에는 조선 초기
수군이 주둔했던 흔적은 다양하지만
불행히도 유적을 보존하고
남기는 작업은 무척 소홀했다.
포승국가산업단지가 건설될 때
원기마을을 사라지게 하더니
근래 포승제2일반산업단지 건설로
수군만호 주둔지'원터'마저 사라졌다.

 
▲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어부(만호리, 1970년대)
▲ 포승읍 만호리 포구 모습(1984년)

 


7 - 서평택지역의 해양관문 대진大津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포승읍 만호리 솔개바위와 대진에 정박중인 어선들

■ 통일신라의 대당교역 중심포구

교량橋梁과 자동차가 흔치 않던 시절 해로海路와 수로水路는 상품의 대량 운송과 교통의 산술적 거리를 단축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여행의 안정성도 육로보다는 수로나 해로가 나았다. 그래서 하천과 연안 곳곳의 나루와 포구에는 도선장渡船場과 도선渡船을 두어 운영하였다.

도선장에는 도진渡津이라는 특수 촌락도 있었다. 도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나루터의 관리와 선박의 운영에 동원되었다.

조선후기 포구상업이 발달하면서 큰 포구는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천 폭이 좁고 여울과 암초가 많은 곳의 포구는 군사적 방어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때론 공문서의 전달과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의 통행을 돕는 것도 나루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포승읍 만호5리 솔개바위 나루의 본디 지명은 대진大津이다. 대진은 ‘큰 나루’라는 뜻으로 대포진·대진포·한진으로도 불렀다.

이 포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원도호부 치소治所 남쪽 1백리 지점 포내미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포구의 넓이가 10여리나 되었으며 물의 흐름이 세고 만조 때 나룻배로 건너면 홍주와 면주 등 충청도 여러 고을로 통한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진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872년 조선 정부에서 편찬한 <지방도>다. 이 지도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귤산 이유원(1814~1888)의 주도로 제작되었는데 그 귀퉁이에 ‘大津 三國時百濟於槥郡之可里渚東置水軍倉 新羅平百濟置館積穀號稤館 唐之使价商賈皆就館羅人朝貢亦由此因名 大津’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내용을 해석하면 ‘대진은 백제의 혜군 가리저에 속했고 6세기 신라가 지배할 때 객관을 두어 당나라 사신과 상인들이 모두 이용했으며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갈 때도 이곳을 경유했다’는 내용이다.

내용을 두고 당진에서는 ‘한진나루가 곧 대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당시 지도가 만호리 일대를 지배했던 수원도호부의 것이고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 포승읍 만호리 선착장(1990년)

■ 조선 초기에는 군항軍港으로 역할

대진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부각된 것은 여말선초 麗末鮮初다. 여말선초 고려와 조선은 왜구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왜구들은 적을 때는 수 십 척, 많을 때는 수 백 척의 병선을 이끌고 조창漕倉이나 곡물이 풍부한 연안지역을 집중 공략했다. 왜구의 침입으로 평택지역도 안중 일대의 용성현·현덕면의 광덕현·팽성읍의 경양현·평택현이 노략질당하고 백성들이 잡혀갔으며, 국가적으로도 하삼도下三道의 세곡이 운송되지 않아 재정운영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조선이 건국 초부터 왜구 퇴치에 공을 들였던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왜구 격퇴는 국가의 존망 뿐 아니라 백성의 안위와 직결된 문제였다. 또 건국 초부터 수군제도와 봉수제를 정비하고 해안에 관방산성을 축조한 것, 하삼도를 비롯하여 경기도까지 수군水軍을 설치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며, 태종과 세종이 신무기를 개발하여 대마도를 정벌한 것도 모두 왜구의 노략질 때문이었다.

태종 때 경기만 일대에는 남양도호부(화성시)의 화량포에 ‘경기수군절도사영’를 설치하고 포승읍 만호리에는 도만호가 설치되었다. 도만호는 종3품의 무관직인데 나중에는 수군첨사로 바꿔 불렀다. 수군첨사라면 부사나 목사와 같은 비교적 높은 직급으로 큰 진鎭을 이루는 포구에 설치하였고 휘하에 여러 만호를 거느렸다.

조선 초기 대진의 수군첨사영은 세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지면서 종4품 수군만호로 격하되었다. 세조 때에는 왜구침입이 잠잠해지면서 이마저도 혁파하고 모든 병선을 아산만 입구 난지도 수군만호로 통폐합하였다.

만호리에는 조선수군이 주둔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먼저 ‘만호’라는 지명이 그렇고 폐동된 만호4리에는 ‘원터’라는 지명도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원기’마을도 있었다. 이처럼 만호리 일대에는 조선 초기 수군이 주둔했던 흔적은 다양하지만 불행히도 유적을 보존하고 남기는 작업은 무척 소홀했다.

포승국가산업단지가 건설될 때는 제대로 된 지표조사나 발굴 없이 원기마을을 사라지게 하더니 근래에는 포승제2일반산업단지 건설로 옛 수군만호의 주둔지로 추정되는 ‘원터’마저 사라졌다.

 

▲ 굴과 해산물을 손질하는 만호리 아낙(1993년)

■ 평택항의 뿌리로서 조명 받아야

근대近代 대진은 아산만 어업의 전진기지였으며 당진의 한진나루와 연결된 포구였다. 중국의 사신이 오가고 군영 대장들의 호령소리가 하늘을 찔렀던 과거 포구와는 분명 성격이 달랐다.

포구에는 솔개바위마을이라는 진촌이 형성되었고 하루에 한 번씩 황포돛을 단 한선(조선배)이 내포지역(충남 서북부지역)의 사람과 가축을 실어 날랐다. 6·25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나룻배는 동력선으로 바뀌었다. 나룻배에 가장 많이 실렸던 상품은 안중 우시장에 내다 팔 농우農牛였다. 한선 한척에는 통상 농우 10마리를 실을 수 있었다. 포구에 배가 정박하면 소장수들은 주막에서 목을 축이고 성해리 은성주막을 거쳐 안중장으로 넘어갔다. 때론 바다를 사이에 두고 혼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포구에서 들물식당을 운영하는 김종O 씨의 친정은 경남 남해다. 남해에서 고기잡이 왔던 어부가 김 씨의 시아버지다. 희곡1리의 김난O(86세)도 당진 송악면이 친정이다. 친정에서 대례를 올리고 첫날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풍랑이 일어 3일 만에 시댁으로 건너왔다.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잦으면서 포구에는 객주와 주막이 생겼다. 솔개바위마을 토박이 김(82세) 씨의 조모도 주막을 운영했다. 김 씨는 옛날 솔개바위 주막의 풍경을 이렇게 말했다. “당진 한진나루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어부들이 평상에 앉아 술을 마셨지. 나룻배가 하루에 한 번씩 오갈 때는 주막 뒤쪽 봉놋방에서 자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 사람들 돈 없으면 외상하고 갔다가 다음 장에 갚기도 했어요. 전라도에서 고기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돈 떨어지면 외상했다가 다음 해 봄에 갚기도 했고”

1960~70년대에는 포구어업이 발달하면서 횟집들이 많아졌다. 횟집에서는 생선회와 막걸리를 팔았는데 손님들은 평택 시내나 멀리 안성에서도 왔다.

1970~80년대 대진으로 몰려든 어선들은 대중없었다. 포구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지경O(71세)씨는 당진·서산·태안, 멀게는 파주 문산포와 강화 옹진에서 몰려든 배가 성어기 때는 50여 척이 넘었다고 말했다.

포구마을에서는 수산업도 발달했다. 만호리 여성들은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부터 이듬 해 봄까지 굴과 바지락을 잡았다.

굴은 배를 타고 아산만 갯벌 깊숙이 들어가서 땄다. 굴은 조세潮勢가 세고 돌풍이 자주 일었던 영웅바위 근처나 원정리 끄트머리 멍거니 부근에 많았는데, 1960년대 초 일을 마치고 영웅바위 근처를 돌아오던 어선이 전복되어 십 수 명이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산만 어업은 1970년대 중·후반 아산만과 남양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봄철 산란기의 어류들은 안성천과 발안천 하류로 몰려들었는데 방조제가 막히면서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내리막길을 걷던 아산만 어업은 1990년대 초 평택항만 공사가 본격화되면서 막을 내렸다. 어업을 하던 주민들은 어업보상을 받고 항만공사에 취직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나룻배가 닿았던 포구는 평택항여객터미널이 대신하였다. 어선들이 접안하던 뱃터에는 5만 톤급 상선들이 철강과 자동차를 실어 나르고, 포장마차가 즐비했던 해안가에는 평택지방해양수산청과 평택항마린센터가 우뚝 솟았다. 모든 것이 변했다.

 

▲ 평택항 건설현장에서 바라 본 만호리 선착장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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