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현 교수의 그때 그시절 평택은 - 63 - 김철수 강연 도중 중지당해
1922년 6월 18일
조선청년연합회 전국순회강연 평택 강연에서
‘독립생활’을 ‘조선독립’으로 해석한다는 이유
일본은 1910년 8월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무단통치를 단행했다. 그중에서도 ‘집회와 결사’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3·1운동을 전개해 독립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에 일본은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했지만 식민정책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문화통치가 시작되면서 제한적이지만 집회와 결사 등 일부가 용인됐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청년단체들이 조직됐고 이를 통합적 운동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1920년 7월 ‘조선청년연합회’가 결성됐다.
조선청년연합회는 결성 이후 전국순강대(全國巡講隊)를 조직해 순회강연을 했다. 평택은 1922년 6월 18일 평택공립보통학교에서 강연했는데 사단이 나고 말았다. 김철수의 강연 중 ‘독립생활’이 문제가 됐다. 김철수는 경남 양산 출신으로 일본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유학 중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귀국 후에는 조선청년연합회 결성을 주도하는 한편 의장으로 선출돼 청년회의 연합운동과 강연 등 계몽운동을 선도했다.
김철수는 6월 18일 밤 고용환에 이어 강연을 했다. 제목은 ‘오인 생활의 개선’이었는데 강연 중 ‘독립생활’이라는 말이 빌미가 돼 강연 중지를 당했다. 당시 강연에는 반드시 일본 사복경찰이 사찰을 했는데 이 말이 거슬렸던 것이다. 결국 강연회는 해산됐고 김철수는 평택경찰서에 장시간 갇혀있었다.
그런데 강연 중지 이유가 황당했다. ‘독립생활’이라는 의미를 평택 사람들은 지식 정도가 유치해 ‘조선독립’으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강연을 중지한 일본 경찰은 궁색하게 변명했다. 이 사건을 반대로 해석한다면 ‘평택 사람들은 지식 정도가 유치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독립의식이 강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강연 중지사건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1922년 6월 23일자 신문에 ‘독립생활이 문제호, 경찰당국에 질문’이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강연 중지를 ‘경찰의 몰상식한 행동’이고 오히려 ‘무식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기관이었던 평택경찰서의 과잉 충성이 부른 허세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