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없는 곳에서 
지역 정체성 논할 수 없다”

 

할아버지 정화진, 한번 입수한 자료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버려
아버지 정우명,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사료 원형보존에 공들여
정수일, 함석헌·천관우 선생에게 역사관 배워 작은 것도 소중히

 


경기도내 31개 시·군 가운데 29개 시·군에 120여개가 넘는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지만 아직 평택에는 박물관이 없다. 이에 평택에 연고를 둔 역사학·경영학·언론학·문학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2014년 평택시에 박물관 건립을 위한 지식기부단체인 ‘박물관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지난 4월 10일 평택시남부문화예술회관 세미나실에서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지역에 산재해 있는 소장가들과 함께 그들이 생각하는 박물관에 관한 이야기를 경청하고 소장하고 있는 사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은 평택시박물관연구소 연구위원들을 비롯해 김혜영 평택시의회 의원, 박철순 평택문화원 부원장, 김성규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회장, 박동린 전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회장, 최치선 전 평택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등이 참석해 이야기를 경청하고 의견을 함께 나누었다. -편집자주-

 

정수일의 할아버지, 정화진
손에 들어온 자료는 끝까지 보존
각종 자료 1년 단위로 묶어 보관

“어릴 적 기억에 할아버지는 손에 들어온 문서를 버릴 줄 모르는 분이었어요. 편지·영수증·증명서 등 수집한 자료를 신문지로 말아 만든 끈으로 묶어 1년 단위로 차곡차곡 모아 다락방에 보관했죠. 할아버지는 메모지 한 장 영수증 한 장 버리지 않고 꼼꼼히 모으는 습관을 가지셨죠. 어느 날인가 심심해서 습자지로 된 서류 몇 장 뜯어내 제기를 만들어 놀았는데 신문지로 만든 친구 제기보다 내가 만든 제기가 훨씬 가벼워 신나게 놀았는데 그날 저녁 할아버지에게 혼쭐이 났어요. 지금 생각하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제기를 만들어 날려버린 셈이죠”
정수일의 할아버지 정화진은 1876년경 현덕면 인광리에서 태어나 1950년경 작고할 때까지 많은 자료들을 모아 놨다. 다락방에 고이 간직해온 자료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묻어나는 소중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손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 함석헌 옹과 정수일 소장가

정수일의 아버지, 정우명
고려대 재학 시 차별 대우에 자퇴
선대로부터 내려 온 것 온전히 보관

아버지 정우명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다니다가 2학년 재학 당시 한국 학생들을 차별하는 일본 학생들과 싸움이 나 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자결한 독립운동가 민영환의 집에 기거하며 가정교사로 있을 때 그 집에 드나들던 한 인사가 잘 봐서 부천군청에 취직했지만 그곳에서도 일본인들은 모든 주요 보직을 자신들이 다 차지하고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에 머리를 자르라는 강요를 하는 등 차별이 심해 그 자리도 뿌리치고 공직에서 물러나 만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만주에서도 시청인 길림성공서에 임시직으로 입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맡은 일은 마약감시단이었다. 마약을 잘 활용하면 거액의 돈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에 당시 길림조선인회장과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식숙 선생과 모의를 해 마약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몰래 빼돌린 마약을 되팔아 독립군 군자금으로 써오다 이 일이 발각돼 쫓겨나 길림성 목단강 유역에서 농장을 운영했고 1945년 해방을 맞자 세달 동안 밤에만 이동해 서울로 돌아왔다. 만주에서 태어난 정수일이 여섯 살에 고국 땅을 처음 밟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꼼꼼히 자료를 모으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모아놓은 자료를 손도 못 대게 했어요. 심지어는 다 쓰러져가는 집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그대로 두라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을 원형보존에만 공을 들였죠”

사료 소장가 정수일
함석헌·천관우 선생 역사관 이어받아
수많은 사료, 박물관 설립으로 완성돼야

▲ 민주화운동 당시 수감중인 정수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역사의식을 품어온 정수일은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가 동아일보 주필이면서 사학자인 천관우 선생을 모시게 되면서 역사관을 키워나갔다.
천관우 선생이 경희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강의를 갈 때면 항상 정수일을 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다. 지금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선생은 별도의 가르침도 주었지만 자신의 대학원 강의 때마다 데리고 가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가르치시려 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수일의 핏속에는 서서히 역사의식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정수일은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 함석헌 선생이 이승을 떠날 때까지 아끼는 제자였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인 함석헌 선생은 6.25한국전쟁 때문에 북에 두고 온 자료들에 대해 평생 아쉬움을 표현했다. 참 스승인 함석헌 선생에게서 배운 역사의식과 사료에 대한 애착이 청년 정수일을 본격적으로 사료 수집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됐다.
“당시 서울에서 재야운동을 했던 때라 서울 시내에서 열리는 각종 집회나 운동권 관련 문서를 다 모았어요. 제가 각종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이 소문나기 시작하자 지방에서 집회가 열려도 운동권 동지들이 자료 몇 부씩을 챙겨 보내왔어요. 그러면 그 자료를 선배들에게 한부씩 전해주고 나머지는 내가 보관했어요.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본격적으로 운동권 활동을 하면서 정보부에 잡혀가 모아둔 자료를 대부분 압수당한 것과 혹시 몰라 고향에 보관해둔 것을 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어머니가 몰래 불태운 것이죠”
정수일은 1986년 민주화운동이 끝나갈 때쯤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 고향 평택으로 내려왔다. 다 쓰러져가는 집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설득해 집 두 칸을 새로 내는 과정에 다락방 속에서 할아버지가 정성껏 모아놓은 또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며 보관해온 여행용 가죽가방 4개 분량의 각종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 속에는 많은 사료들이 있었는데 빗물을 먹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자료들도 있었지만 온전한 자료들만 추려서 지금까지 보존해오고 있다. 사료 보관에 대한 열정의 피가 할아버지에게서 정수일에게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정수일은 3~4대에 거쳐 내려온 가족사 자료로 족보와 동래정씨종약취지서·소족·사진류·편지류·결혼 사주단자 등 광범위한 사료들을 보관하고 있다. 지역사 사료로는 120~130여 년 전 진위현 광덕지역 관공서 발급 문서나 증명서·영수증·상장·대한제국 당시 토지문서 등의 자료를 갖고 있다. 이들 사료는 현덕면 인광리 자신의 집 1층 거실을 자료실로 활용해 보관하고 있으며 수량은 숫자로는 셀 수가 없고 4톤 트럭 1대 분량은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정수일 사료 소장가는 “박물관이 없는 곳에서 지역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평택은 박물관 설립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과거 평택군 당시 군민들로부터 수집한 소중한 사료들을 망실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의 사료 수집은 행정의 신뢰성 회복이 관건이다. 평택시가 박물관 설립 계획을 세우고 지역의 산재된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보존·연구·전시할 수 있는 자세와 노력이 엿보인다면 지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료들을 기꺼이 대여 또는 기증할 의사가 있다”며 “앞으로의 계획은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사료들을 각 분야별로 분류하고 해제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정수일 소장가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도 선대들이 이루지 못한 일들을 우리 세대에서 정립해 후대에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한 것이며 사료 소장과 박물관 설립도 이러한 맥락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정수일(鄭秀一)

1940년 만주에서 태어난 정수일은 6살 때 조국의 광복을 맞아 아버지의 고향인
현덕면 인광리로 돌아와 현덕초등학교-안일중학교-안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노동분야에 관심을 갖고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교육원을 다녔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재야의 길을 걸으며 투쟁의 삶을 살아갔으며
함석헌·천관우 선생을 모시면서 정신적 토양도 비옥해졌다.
정수일은 ▲평택군4H구락부 연합회장을 시작으로 사회운동을 해 ▲민주회복국민회의 재야간사
▲민통련 사회국장 ▲평택농민회 고문 ▲전국농민운동연합 부의장 ▲평택지역사회개발연구소장
▲3개 시·군 통합 추진위원 ▲평택시발전협의회 활동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장 등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왔다.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을 나와 지금은 현덕면 기산리에서 농사지으며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면서 후배들에게 교훈을 주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사료 소장가 정수일의 주요 소장품들

사료 소장가 정수일 씨의 소장품은 ▲선사시대 돌도끼와 돌칼·토기 등 논·밭을 경작하면서 수습한 유물 ▲동래정씨 가문 문서 ▲관공서 발급 문서와 증명서 ▲민주화 운동과 운동권 자료 ▲각종 행정자료 등으로 소장 사료의 폭이 넓고 수량도 방대하다. 본 기획특집에서는 지면 관계상 지역사와 관계가 깊은 서지류 일부를 소개한다.

■ 동래정씨종약취지서(東萊鄭氏宗約趣旨書)
- 필사본, 1923년, 19.5×29.5㎝

 
현덕면 황산리 소재 동래정씨 6세조 호은(湖隱) 공의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설정한 토지(제전·祭田)와 선산의 수호를 위해 종약을 맺은 문서이다. 묘산과 묘토는 종중 공동 재산(공유·共有)으로 하고 그 관리를 종손이 맡으며, 수익은 제사에 쓰도록 하여 종원 26명이 연명 서명하였다. 묘산과 묘토의 위치와 면적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일제강점기 동래정씨 문중의 선산 수호를 위한 노력의 일단(一端)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 지계 양식(地契 樣式)
- 대한제국 지계아문→토지소유자, 1901~4년경, 53.5×23.9㎝

 
지계(地契)는 대한제국기에 토지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문서나 문권(文券)을 말한다. 대한제국 시대에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지계를 발행하였다. 지계(地契)는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강원도와 충남 일부 지역에서 양전 사업을 실행하면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시키고 토지의 측량과 관리·조세 부과를 일원화하기 위하여 발행한 문서이다.
같은 내용의 지계를 세 장 발부하여 지계아문·지방 관청·토지 소유자가 각각 한 장씩 보관하도록 하였다.

■ 협성학교졸업증서(協成學校 卒業證書)
- 협성학교→정우명, 1924년, 38.5×27.0㎝

 
1908년 6월 29일생인 정수일의 아버지 동래정씨 정우명(鄭雨明)이 17살에 사립협성학교의 보통(普通) 정도의 교과과정을 마친 후 받은 증서다.

■ 면화출하명령서(棉花出荷命令書)
- 평택군수·평택경찰서→정화진, 1941년 12월 10일, 18.0×12.9㎝

 
1941년 12월 10일에 평택군 현덕면 인광리에 사는 정수일의 할아버지 정화진(鄭華鎭)에게 12월 26일까지 책임출하공출량인 면화(솜) 42근(=25.2㎏)을 안중공판소(安中共販所)로 출하하라는 평택군수와 평택경찰서장 공동 명의의 면화출하명령서로 이 자료는 일제 말기 전시체제기 강제공출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다.
일제(日帝)는 식민지 조선에서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1939년부터 강제공출을 통한 농산물 수탈정책을 실시했다. 공출제도는 처음에는 생산의욕을 높이기 위해 실시됐으나, 태평양전쟁의 도발로 재정과 식량 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1942년 ‘조선식량관리령(朝鮮食糧管理令)’을 발포해 전체 농민을 대상으로 자가 소비용을 제외한 쌀 전량과 잡곡까지 강제 공출하는 한편, 보리·면화·마·고사리 등 40여 종에 이르기까지 공출제도를 확대하였다. 이 자료의 부기사항은 공출의 강제성과 수탈성을 잘 보여준다.

■ 면포배급신청서 양식(綿布配給申請書 樣式)
- 국민→면장(駐在所 首席/里區長), 1940년, 12.0×16.9㎝

 
신청자의 주소지·가족 남녀 인원수·호주의 성명·1종별 마(碼=야드)·사유 등을 적도록 한 면포배급신청서다.
이와 관련해 1940년 8월 7일자 ≪동아일보≫의 ‘면포(綿布) 배급에 지구제(地區制) 설정’ 기사에 의하면 면포통제위원회에서 통제면포(統制綿布)의 배급을 합리화하기 위해 배급의 지구제를 설정했다고 보도했다.

■ 협의사항(協議事項)
- 경기도농회 간행, 1935년, 15.3×22.3㎝

 
경기도농회에서 펴낸 것으로 농촌진흥·농지령(農地令)·벼 건조제 개량과 이에 대해 지주에게 요청하는 내용·벼의 포장 개선·벼의 저장과 판매 개선에 대한 안내사항을 알리는 자료이다. 일본어와 국문을 병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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