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최현규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선생이 한광중 2학년 때였습니다.그리고 군복무를 마치고다시 만난 최현규 선생은군 복무 때 만들어 둔악보를 내밀었습니다.그렇게 동요 ‘노을’은 탄생됐습니다.그 인연에 감사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거나 들을 때 우리는 옷깃이 옷소매인 줄로 생각해서 길을 오가다가 슬쩍 옷소매가 닿
세상을 사는 일에 원칙은 없다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만 원칙이고 진리인양 착각하며 불행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 원칙은 행복이고 원칙에서 벗어나면 행복에서도 벗어난 것이라는 자기 생각의 울타리 속에 갇힌 채 괴로워하는 사람들 찬바람이 불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한여름 내내 노래를 부르던 풀벌레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기온이 뚝 떨
도대체 평택이 뭔데?몇 번을 신청한아내의 근무지 변경신청도 번번이 탈락되면서 마음고생도 더해갑니다. 그가 강원도로 가면쉬울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는 왜 평택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도대체 평택이 뭔데? 1980년대만 해도 시골길을 가거나 시골 5일장에서 만나던 막걸리 집이거나 객주 집을 인근 사람들이 부르는 말에 ‘쌍과부 집’이란 상호가 적지 않았습
그리운 땅 평택며칠 전 평택 신한고등학교 전신인 평택동고등학교에서 미술수업을 하던 홍윤기 선생이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받자 갑자기 지나간 시간 평택에 자리 잡고 평택을 넉넉한 땅으로 만들던 두 사람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며칠 전 평택 신한고등학교 전신인 평택동고등학교에서 미술수업을 하던 홍윤기 선생이 전화를 했습니다.멀리 전라북도 무주에서 호도나무 농장
정신문화로 극복하자‘탄저균’ ‘메르스’ 공포에서 벗어나 모든 평택시민이 하나가 돼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 위한 평택 ‘평화대축제’를 제안합니다.평택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아갈 그 날을 위해서 말입니다 감기가 낫지를 않습니다. 조금 낫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콧물이 시작됩니다. 가벼운 몸살, 두통이 며칠 계속되더니 급기야 온몸이 몽둥이로 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 ‘뽐뿌’가 있는 집에서는 고무함지박에다가 찬물을 받아놓고 그 안에다 수박을 담가 차게 했고 우물이 있는 집에서는 군용 PP선으로 만든장바구니 안에 수박을 넣어서는두레박줄에 묶어 우물 안에넣어두기도 했습니다 후배 김 선생이 결혼을 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그를 까다로운 사람이라 말하고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를 고약하다고 말
미래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만드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늘의 잘못을 헤아리는 지혜로운 분별력과 통찰력이 있어야 할 것이지요. ‘대서소代書所’ 말 그대로 돈을 받고 대신 글씨를 써주는 곳입니다.왜정시대와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먹고 사는 일에서 헤어나질 못한 많은 아이들, 계집아이는 혼
가칭 ‘국립평택의료원’ 설립은 ‘만병통치’가 아니다생각지도 않은 병에 걸려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현대식 큰 병원 특실에 누워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모든 것을 다 잃고 난 연후에 병원이란 단지 ‘사후약방문’에 불과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은행 사무실에서 은행에 들어오는 돈을 들이고 내는 출납일을 담당하고 있는
누가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하늘도 우리를 버린다’ 그러니 건강을 지켜야 할 시민의 권리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할 것입니다 중동 호흡기병 ‘메르스’, ‘탄저균’, ‘사드’ 미사일.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평택시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가 평택의 민심을 바짝바짝 타들어가게 하고 있습니다.‘얘, 아범아! 꼭 기차를 타고 가야
우리 고장 평택은 과연 안전한가?아무리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지만 평택시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공해문제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섣부르게 지나칠 일은 아닐 것입니다 평택에 위치한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살아있는 탄저균으로 인체실험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갑자기 생화학무기에 대한 공포가 온 평택을 술렁이게 하고 있습니다.탄저균. 호흡기에 감염이 되면
시민의 권리는 어디 있는가?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격이지요. 눈 가리고 아웅 입니다. 앞으로 3년이 지난다고 해서 재래시장 상권에 무슨 변화가 올 것이며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아무리 따져보아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니까 재벌이든 누구든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박동규 선생이 겪은 평택 역사는 사람이 만듭니다. 그리고 한 번 만들어진 역사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한 평택이라는 오명汚名을 씻어내는 일은바로 오늘 우리의 몫일 것이지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가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집 없는 서러움 오늘 30년 만에 정렬이가 새처럼 하늘을 날며 그린 집 그림을 찾고 보니 천하의 보물을 얻은 듯 기쁜 마음이 한량 없습니다.8살 때 지도로 ‘우리 집’을 그린 바보 정렬아, 사랑한다 봄이 되어 서울 아파트촌에 가면 겨우내 입던 옷을 빨기가 싫어 헌옷 수거함 통에 버린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옷이 중국으로도 가고 아프리카로
도덕적이지 못한 나라는 필히 망한다 지난 한 해 재산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정치인들,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그 권력으로 자신의부정부패를 정당화 하고치부하는 일에나 쓰는 부도덕한 나라는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지요 ‘조선인에게는 노예근성이 있다’조선시대 도공들이 불에 구어 낸 그릇 밑바닥을 보고 왜놈들이 한 말입니다. 밥그릇이든 술병이든 제기든 흙으로 빚
응달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 이웃들 아무리 미군 위안부들이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라고는 하지만분명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들입니다.게다가 평택과 송탄지역에 자리한미군부대의 규모를 생각하면평택지역 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은다른 어느 지역보다 시급한 문제입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그리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으로 인해 일본 천황은 항복을
문화는 스스로 누리는 것이다 문화란 내가 나서서 찾아가 스스로 즐기는 것이지 가만히 있어도 때가 되었다고 누구에게든 손에 쥐어주는 복지福祉는 아닐 것이지요 전교조 운동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으니 30년 전 쯤 일입니다.중국에서 일어났던 문화대혁명시절 많은 지식인들이 겪었던 하방下放과 마찬가지로 교육대학을 막 졸업한 혈기에 찬 많은 젊은 선생님들은 자원해서 첫
연필을 깎으면서 얻는 지혜전인교육,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임기응변력 그리고 순간적 판단력과 집중력을 길러자신을 지키며 세상을 살아가는 일.손으로 연필을 깎는 일에서 ‘길’을 찾습니다. 흔히들 세상에서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님들 때부터 ‘하나’ 가 의미하는 기본이 몸에 배도록 어른들은 아이들이
인재를 기른 숨은 후원자 이용복 선생 흔히 성공만 강조하지 과정은 무시되는 현실에 음지에서 양지로 향하게 한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숨은 후원자가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너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니!?-대통령이요1950~60년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는 바
그리운 ‘고향’ 평택 평택에 세우고 싶은 민속마을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던옛집 그대로 모든 문화와 놀이와 일을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고향을 만들어 ‘고향’을 잃어가는 아이들이 누구라도 잊지 않고 해마다 찾아오는 영원한 ‘고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평택. 주말이면 가족들과 손잡고 오를 수 있는 그럴듯한 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여름 동네 개구쟁이
슬픈 날의 우리들 - 상익아, 어디 가냐?- 아니요. 할아버지 오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었죠- 기다리긴, 인석아. 이 할애비가길 잃어버렸을까 봐 그러냐!친구가 불러서 잔칫집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나 친구들과약주를 드시느라 늦으셨다며 할아버지는 비닐봉투에다먹을 것을 수북하니 담아 오셨습니다 창문 한쪽 작은 화분 속 꽃잔디에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내려앉는 오후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