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길 위에서 태어나길 위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다사람에게 길은 삶이고 소통이며‘인생’으로 비유된다 전통적으로 평택은 길의 도시다.평택지역에는 조선시대 10대로 뿐 아니라중로·소로·수로·해로가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근대교통은 전통의 도로망에철도와 신작로를 선물했다.여기에 30여 년 전에는 항만이 생겨났고조만간 고속철도까지 보태진다고 한다.평택사람들
시장을 평택동으로 옮기려고 계획했던 것은새시장 일대가 대부분 논과 밭이었고철도역과 시외버스터미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새시장 조성은 평택읍에서 주도했다.평택읍사무소는 논밭을 메워7평, 10평짜리 상가건물을 짓고는일반에게 분양했다.분양가는 7평짜리 상가건물의 경우평당 10만원이었고지가地價는 별도였다.당시 새시장 상가는인기리에 분양됐다.시장이 옮겨오면 부동산 가
안정리가 크게 변모된 것은 일제 말이다일제 말 팽성읍 안정리와 함정리 일대에일본 해군의 보급창고와 비행장이 건설됐다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일곱집매 일대에는상가들이 들어섰고주변의 산등성이와 논밭에는판자촌이 형성됐다.기지촌 주민들은미군기지에 근무하는 사람과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상인들로 분류됐다.미군기지 근무자들은기지 정문과 가까운 안정1리나송화2,
재빼기 구 상권이 축소되는 과정에서도동쪽 신장터 점포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시장을 옮기면서 상점이 300여 개에 육박하고 있다 구 안중장터였던재빼기 골목은 한산하다.서평택지역 다섯 개 읍·면 뿐 아니라아산만 건너 충청도 내포사람들과발안천 건너 화성사람들까지모여들었던 안중장 골목도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광신액자에 모여든안중 토박이들은이제 재빼기 골목의 주인은중
안중읍은 서평택지역의 중심이다안중장의 뿌리인 직산장은 19세기 후반학현리와 화양리의 경계지점인 재빼기로 이전했다 초기 안중장은 안중리 덕성식당 앞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이 골목은 ‘재빼기’라는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긴 능선으로 이뤄져 있다.나중에는 덕성식당 골목에서안중고등학교 구 정문을 지나는골목도 번화했다.이 골목은 포승읍 만호리 대진에서안중장으로 들어오
한 때 기지촌에 가장 많았던 가게는양복점과 옷가게, 화랑을 들 수 있다양복의 구매고객은 주로 미군들이었다 미군들은 외출할 때 사복을 입었고장교들은 크고 작은 파티도 많았다.흑인들은 클럽에 갈 때도 양복을 입었다.기지촌 양복점은 수제로 제작할 뿐 아니라미국의 수제양복 1벌이면대 여섯 벌을 맞출 만큼 값이 쌌다.그래서 귀국하는 미군들 중에는 선물용양복을 열 벌
기지촌은 분단과 외국군 주둔이 낳은 도시다미군은 전쟁 막바지 분단고착화의 기미가 보이자한반도 곳곳에 미군기지를 건설했다K-55 오산AB는 주둔 초기 만해도적봉리에 정문을 두었고곳곳에 소통문을 설치했다.기지촌은 적봉리 정문 초입의‘사거리’에 먼저 발달했다.그러다가 정문이 신장1동 제역동일명 지골 부근으로 옮겨가면서신장쇼핑몰 일대가 번화하기 시작했다.미군 기지
일제강점기 시가지의 중심은 ‘서정리역전골목’이었다역전골목 좌우와 국도 1호선 건너편에는공공·종교·의료기관, 식당과 단체가 자리 잡았다 서정리장은 1910년 전후 개장했다.서정리역전에 장시場市가 형성되기 전에는진위읍내장이나 신장동의 새장터,안중장과 수원장, 소사장이가장 가까운 장시場市였다.서정리장은 전형적 오일장으로 시작했다.개시일은 2일과 7일이었는데가까운
통복시장의 3대 상권은 싸전·우시장그리고 포목전(피륙전)이었다미곡상·포목상·소장수쯤 돼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1980년대만 해도 장날 포목전은기성복이나 한복을 사려는 사람들로발 디딜 틈이 없었고평일에도 바느질감이 밀려서제 때 물건을 만들어주지못할 때가 많았다.주단골목은 2000년 전후급격히 쇠락했다.젊은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와인터넷 쇼핑몰이나 한복대여점
예로부터 평택장은 싸전과 쇠전이 가장 컸다싸전의 주인공은 미곡상들이다근대이후 평택장은 미곡의 집산지이며 중계지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통복시장 싸전거리에는미곡상점이 100여 개가 넘었다.여기에 장날이면노점들과 주변 농민들까지 뒤섞여북새통을 이뤘다.눈치 빠른 ‘거간居間’들의 술수,‘말감고-監考’들의 현란한 손재주도싸전의 볼거리였다.서울의 도매상인들은이른 새
통복시장의 기원은 평택장이다평택장은 1905년 1월에 개통된경부철도 평택역 주변에 발달한 장시다 평택지역의 장시는 진위면 봉남리나팽성읍 객사리 같은 행정의 중심지,경양포나 옹포·동청포와 같은 포구주변삼남대로나 충청수영로와 같이육로교통의 요지에 나타났다.진위면 봉남리 진위읍내장팽성읍 객사리 평택읍내장, 안중읍에 안중장포구주변에 발달했던 청북면의 신포장고덕면
평택동의 번화가를 ‘명동골목’이라고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부터다.새 시가지는 부챗살 도로망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철도역에서 동북으로 500미터 지점의경찰서와 평택군청, 읍사무소,북쪽의 통복시장과 세무서그 사이를 지나는 국도 1호선과 38호선은중심가로를 형성했다.일제강점기 삼거리라고 불렀던 곳이나중에 시장로터리로 명명된 것도한국전쟁 뒤의 일이다.명
원평동은 일제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근대도시다.경부선 철도건설을 맡은 일제는 향후에 있을식민지배와 수탈을 염두에 두고 철도역을 선정했다 평택역전에 평택장이 개장한 것은1910년대 초부터다.평택장은 본정통 평화병원우측으로 형성되었다.평택장의 대표적 거래품목은평택평야의 쌀이었다.1913년 경기도 기록에도평택장의 미곡상은 15명이 넘었다.많아야 5명 아니면 한두
평택지역에는 아리랑고개가 있다팽성읍 본정2리 이름도 그렇고, 함정1리로 오르는 고갯길비전동 재랭이고개도 아리랑고개라고 불렸던 적이 있다 기지촌은 처음에는함정리와 도두리 부근의민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1960년대 초쯤에는기지 후문 둥글재라고 불렀던‘아리랑고개’로 옮겨왔다.아리랑고개에 미군 상대 술집과한국인들을 위한 식당,선술집이 생겨나면서기지촌 여성들이 몰
서낭고개는 덕우1리에서 후사리·용성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서평택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서청북면 현곡리와 수원 그리고 서울을 오갔다 산이 적은 평택지역에서도용성리와 덕우리 일대에는크고 작은 산들이 많다. 자미산·비파산과 함께옥길리 동쪽에는 무성산이 있고,덕우1리 뒤쪽에는 신죽대산,덕우1, 2리 사이에는 달보는산이 있다. 덕우1리 앞의 낮은 산은 안산이며남쪽
당재 너머 마을 서재는 상서재와 하서재로 나뉜다상서재에서 당재 구간에는 기다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싯굴·먹골·성너머·한작골과 같은 골짜기가 발달했다 하서재는 통복천과 함께 살아왔다.평택에서 하천 변 삶은득得보다 실失이 많다.조선후기 충청수영로는하서재에서 둑방을 따라서남쪽으로 내려가다가통복교에서 하천을 건넜지만삶이라는 것이 한 방향으로만다닐 수는 없다.하서재에
삼남대로는 오룡동을 지나 신리 장호원을 지났다오리골을 지나 한양을 오가던 맹사성이 토호들의 간청으로오룡동길로 행로는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백치는 진위면 마산리와 은산리 일대태봉산과 다학산 줄기를 넘는 고개다.마을주민들은 ‘염봉재’라고 부르는데,그것은 장시가 발달했을 때소금장수들이 넘나들던고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염봉재는 ‘소금장고개’라고도 부른다.다른
숯고개는 송탄지역의 대표 지명이다‘숯고개’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에‘탄현炭峴’으로 표기되었다 ‘숯고개’가 제법 넓은 지역의대표 지명이 된 것은진위현 세곡 운송의중심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9세기 후반 탄현면은일탄면과 이탄면으로 나눠졌다.일탄면 지역은신장동·지산동·송북동·독곡동 일대였고,이탄면은 서탄면에 속하는적봉리·야리·신야리·장등리였다.
조선 후기 삼정리를 거쳐 안중읍 가는 길도 각광받았다 근대전후 안중읍 방향은 안중장이 현덕면 황산리에서오성면 안중리로 옮겨가면서 크게 발달했다 붉은 고개는 안중읍 송담2리신창아파트 옆을 넘어가는 고개다.이 고개는 안중을 거쳐발안장으로 가거나수원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는요로要路였다.현덕면 신왕리와 덕목리,안중읍 삼정리·대반리용머리마을 사람들도안중장을 볼 때
관두머리는 동평택에서 안중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관두머리가 안중장의 관문이 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일제강점기 국도 38호선이 건설되면서 주막이 들어섰다 관두머리의 다른 이름은 정거장이다.해방 후 버스정거장이 있기도 했지만오래 전부터 국도 38호선을 따라오가던 사람들의 쉼터였기 때문이다.정거장에는 동네 주민들과 장사꾼들만쉬어 가는 것은 아니었다.한국전쟁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