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생각에 힘든줄 모르는 ‘바보 아버지’

대가족 돌보는 바하둘, 직장 내 왕따 ‘고통 커’
자녀 교육 관심 큰 비가스, ‘실직에 질병까지’

▲ 네팔에서 온 두 친구 비가스 쿠마르와 민 바하둘 다마이 씨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는 전 세계 산악인들에게 언젠가 한번은 꼭 도전하고 싶은 곳이며 동경의 대상이다. 최근, 굳이 전문산악인처럼 정상 등정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히말라야의 웅장함과 신비를 즐길 수 있는 트래킹코스가 많이 개발돼 이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폭증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일자리를 찾아 세계로 진출하는 네팔인의 행렬 또한 만만치 않으며 그 중 한국을 찾는 이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네팔 출신 근로자 민 바하둘 다마이(38) 씨와 비가스 쿠마르(40) 씨도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았다.

바하둘, 16명의 대가족 뒷바라지
인도아리아계의 전형적인 모습인 다소 검은 피부에 선량하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바하둘. 큰 키에 신체 건장한 그는 최근까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근무했었다. 그다지 일이 어렵지도 않고 일거리도 많았던 터라 잔업까지 해가며 열심히 일하면 한 달에 200만 원 까지 벌수 있었다. 바하둘은 150만 원을 고국의 가족에게 보내고 나머지 50만 원을 가지고 검소한 생활을 해왔다.
바하둘의 고향에는 아내와 두 아들 외에도 나이든 홀어머니, 여동생 하나, 남동생 다섯, 조카 등 모두 16명의 대가족이 함께 살고 있다. 주업인 벼농사는 겨우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
다행히 바하둘이 부쳐주는 한국 돈 150만 원이면 네팔에서는 중류층 생활이 가능한 큰돈이어서 자녀와 동생들은 물론 조카들까지 교육시켜가며 넉넉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바하둘에겐 큰 고민이 생겼다.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17개월 정도로 얼마 남지 않아 내년 말 귀국 때 까지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만 최근 일자리를 옮기기 위해 사직했기 때문이다.
“사장님께서 무척 잘 대해주셨고 월급도 꼬박꼬박 잘 나왔습니다. 회사에 대한 불만은 없었지만 함께 생활하는 스리랑카 동료들과의 갈등 때문에 너무 힘들어 사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7명의 스리랑카 직원들 틈에 혼자 말도 통하지 않은 그는 4월 말 사직을 택하고 말았다. 다행히 사정을 인지한 사장이 이적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줘 고용노동부에 재취업 신청을 해놓은 바하둘은 보다 나은 직장이 구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바하둘은 이번 기회에 미래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할 계획이다. 그래서 3개월 전 네팔에 귀국해 한 달간휴식을 취하면서 부동산을 사놨다. 나중에 돌아와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
“약국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남동생 중 하나가 지금 약학대학에 다니고 있거든요. 졸업하면 약사가 될 동생과 같이 약국을 하겠습니다”
정작 바하둘 본인은 중학교가 최종 학력으로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동생은 그가 보내준 돈으로 약대를 다니고 있으며 일찍 결혼해 낳은 바하둘의 21살 큰아들도 어엿한 대학생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장남 바하둘, 16명의 대가족을 책임진 그의 어깨에 지워진 삶의 무게가 버겁긴 하지만 애써 웃음 짓는 미소엔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결연하기만 하다.

비가스 쿠마르, 남다른 교육열
고용허가제를 통해 농업분야 취업비자를 받고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는 농장에만 취업해야만 하며 다른 산업분야의 직종으로 이직할 수 없다. 2010년 11월 그런 자격을 가지고 입국한 비가스는 이천과 천안에서 채소농장과 양계장을 잠깐 거쳐 최근 지난 4월 중순까지 안성에서 돼지농장 일을 했다.
“농장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쉬는 날도 없이 일했죠. 일요일도 없었어요”
비가스는 농장의 작업환경이 너무 열악한 데다 임금도 낮은 편이어서 다소 대우가 좋은 공장에 취업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했다.
“공장에서 일하면 기본적으로 150만 원은 받을 수 있고, 잔업까지 하면 추가수당을 받아 두둑하게 챙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농장에서는 잔업을 할 기회가 거의 없고 어쩌다 늦게 일해도 따로 수당을 챙겨주지 않았다. 그렇게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보통 100만 원 정도, 잘 해야 120만 원을 받았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보여준 두 발은 성한 곳이 없었을 뿐더러 온통 살갗이 벗겨져 있거나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종아리도 부스럼투성이였다. 가축 분뇨와 접촉하면서 전염된 알레르기 성 피부병으로 걸음도 절름거리며 가렵고 아프다고 호소했다.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갈 수 없습니다. 3개월 치 월급도 아직 못 받았거든요.” 농장주가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닌데 요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퇴직하고 나온 후에도 약속한 날짜를 두 번이나 어겼다고 했다. 네팔에는 홀어머니와 아내, 초등학교에 다니는 세 아이들이 있는데 최근에는 송금도 하지 못해 좌불안석이다.
네팔에 있을 때 인정받는 고속버스 기사로 근무했던 비가스는 당시 받았던 월급 30만원 보다 더 많은 돈인 50만원을 교육비로 투자해 세 아이 모두 영어로 가르치는 영국계 학교에 보낼 만큼 자녀 교육에 열정적이다.
힘겨운 삶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만큼은 이런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때문이다.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면 나중에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있잖아요. 은행이나 사무실에서 일할 수도 있고, 영어를 잘하면 외국에 나가도 취직하기 쉽거든요.”
고국에 돌아가면 다시 핸들을 잡을 계획인 비가스. 당장 발의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이들의 미래를 이야기 하는 그를 통해 ‘아버지’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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