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철 회장 / 원주원씨대종회

8월 28일, 제471주기 제향·첫 추모문화제
구국의 명장 원균에 대한 왜곡 고쳐나가야

 

▲ 원유철 회장/원주원씨대종회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난 원균 장군은 임진왜란의 수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우다 선조 30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칠천량해전에 참전해 장렬히 전사한 구국의 명장이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자 한 명장의 고뇌는 산 자들의 치열한 이해 다툼으로 수많은 억측과 왜곡의 허물이 입혀져 훼손돼 버렸다. 8월 28일 ‘제417주기 원릉군 원균 장군 제향’을 앞두고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원균 장군에 대한 진실과 이해를 구하며 후손으로서 선조의 뜻을 기리는 일에 매진하는 원유철 원주원씨대종회장을 만나 이야기 나눠봤다.

- 원균 장군?
원균장군은 159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돼 부임한 지 3개월 뒤 임진왜란을 맞았다. 임진초 18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이 남해·서해를 거쳐 한강으로 전쟁 물자를 보급하고자 한 전략을 24일 동안 혼자 막아낸 공로가 크지만 역사가 기록하는 것은 5월 7일 옥포대첩부터이다. 지원 나온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과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이룬 원균 장군은 중앙에서 북을 울리며 적을 공파해 대승을 이뤘다. 이후 연합함대는 적진포해전-사천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 12차례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이후 1597년 백의종군한 이순신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게 되며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수륙병진을 요청했다가 곤장형을 받고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는다, 이제 일심으로 순국할 뿐이다’라는 각오로 출병하게 된다. 그해 7월 통제할 수 없는 바람과 파도로 전열이 무너져 칠천량해전에서 장렬히 순국하게 된다.

- 원균 장군 제향과 추모문화제?
모든 제례의식이 그러하듯 원균 장군의 후손들도 제향을 통해 그 어른이 살아온 길과 가르침을 다시금 되짚고 그 뜻을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제향 후에 처음으로 추모문화제가 개최된다. 추모문화제는 지역에서부터 원균 장군의 뜻을 기리며 관심을 환기시키는 자리이자 전국적으로 원균 장군에 대한 오해를 차츰 풀어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제는 계층을 초월해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재주가 모이는 문화향유 공간이다. 누구나가 주인이 되는 문화제를 승화시켜 평택시민들이 원균 장군에 대해 ‘고장을 빛낸 역사적 인물’이라는 주인의식을 갖게 되길 바란다.

- 전쟁기념공원 관련 청원?
경남 거제에는 옥포대첩기념공원과 칠천량해전공원이 조성돼 있다. 원균 장군의 후손으로서 원통한 것은 옥포대첩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기념공원 내에는 원균 장군과 장군의 수하인 이운룡·우치적 장군에 대한 기록물이나 기념물이 전무하다. 또한 우리 수군이 적에게 처절하게 무너진 격전을 기리는 칠천량해전공원에도 순국한 장졸을 기릴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이번 제향 때 옥포대첩기념공원·칠천량해전공원과 관련해 공적을 기리는 기념물 또는 순국한 장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지낼 수 있도록 ‘순국한 장졸들의 예우에 관한 법률’ 등을 제정해 줄 것을 청원할 예정이다.

- 원균 장군의 역사적 평가?
장군의 후손으로서 원하는 바가 원균 장군의 공을 지금에 와서 평가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데도 기록도 없는 허물을 씌어 폄하하는 것만은 막아주었으면 한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해야 역사다. 지금의 우리는 ‘역사가 실록을 따라야 할 것인가? 그것을 고쳐 쓴 수정실록을 따라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할 때이다. 사관들이 목숨을 걸고 기록한 선조실록에는 원균 장군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이 없다. 사후 50년이 지난 후 고쳐 쓴 역사가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대종회는 원균장군기념사업회와 협력해 각종 강연과 학술대회·서적 발간 등에 더욱 힘써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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