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살아온 삶, 이제야 내가 보여요”

 

기남방송 20여년, 숨 가쁘게 달린 기자생활
심장판막이상 발견 후 가족 소중함 깨달아

 

 
1990년대 중반 평택의 유선방송은 화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단순히 지상파방송을 재송신하거나 낮 시간 재방송을 하는데 그쳤다. 그 유선방송이 짧은 기간 동안 경기남부지역까지 관할하는 방송사로 성장해갔고 지역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며 다채로운 소식들을 전하기 시작했다. ‘티브로드 기남방송’으로 대표되는 평택의 유일한 케이블TV는 전국에서도 성공적인 길을 걸어온 모범사례로 손꼽힌다.

기남방송 역사와 함께 한 삶
“청년시절부터 컴퓨터 쪽의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보처리와 그래픽도 배웠죠. 컴퓨터 관련 벤처기업에 들어가 일하기도 했는데 내가 배운 여러 가지 컴퓨터 환경들이 오프라인에서는 어떻게 활용될까 궁금하던 차에 방송 쪽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 거예요. 그게 바로 기남방송이었죠”
티브로드 기남방송에서 일하고 있는 위승환(43) 피디는 컴퓨터가 막 보급되던 시절부터 컴퓨터에 빠져 지냈던 일들을 들려준다. 서울에 있는 프로덕션에서 일하던 그가 아무 연고도 없는 평택으로 내려온 건 1997년, 이제 막 유선방송에서 종합유선방송인 기남방송으로 사업이 확장되던 시기였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케이블방송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던 시기였어요. 대부분 실패하고 사라지던 중에도 기남방송은 꿋꿋이 자리를 잡았죠. 처음 내려왔을 당시만 해도 평택은 정말 시골이었어요. 평택 시내를 30분만 돌면 마주치는 사람을 또 마주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신호등도 많지 않았으니까요”
위승환 피디는 당시 평택사람들은 기남방송이 뭘 하는 곳인지 몰라 방송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인 ‘귀남’이냐고 묻곤 했었다며 큰 소리로 웃는다. 그러나 2000년 초부터 기남방송은 점차 지역을 넓혀 평택·안성·용인·이천 등 4개시를 관할하는 광역방송으로 성장했고 기남방송의 성장과 더불어 위승환 피디 역시 처음엔 30초 단신 뉴스 브리핑에서 점차 10분, 20분, 50분으로 프로그램 시간을 늘려 나중에는 중계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회부기자에서 방송 PD까지
“초창기 방송기자 시절에는 뉴스·프로그램·중계방송·광고 등 여러 가지 분야들을 닥치는 대로 해야 했어요. 방송제작분야 식구들이 6명뿐이었거든요. 제가 맡은 분야는 사회부 쪽이었는데 기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취재를 한다는 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죠. 그래서 무작정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줄 만한 기자 선배님을 찾아가 가르쳐달라고 떼를 썼어요”
위승환 피디는 선배 기자의 가르침대로 1년 동안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찾아가며 얼굴을 익히고 사람들과 친해지며 취재를 이어갔다고 말한다. 12~13kg 정도 무게의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경찰서·교육청·소방서·시청·법원 등을 찾아다니며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찾아 뛰는 동안 쉬는 날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버스가 논두렁에서 전복되는 사건도 있었고 공군비행장에서 훈련기가 떨어지는 사고도 있었어요. 소방차보다도 먼저 불이 난 곳에 달려가 취재하는 날도 많았죠. 기남방송에서 10여년을 함께 근무하던 동료였던 아내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지만 업무시간을 마친 뒤에도 항상 술자리로 이어지는 두 번째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주말에도 늘 피곤에 지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엄두도 내지 못 했죠”
위승환 피디는 자신이 해 놓은 일의 성취감이나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틈도 없이 매일 바쁜 일과를 보내는 동안 정작 일에 파묻혀 자신과 가족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함께 해주는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은 정작 몸에 이상이 생긴 뒤 삶의 막다른 골목에 서본 뒤였다고.

가장 소중한 건 사랑하는 가족
“3년 전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심장판막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길로 큰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거기서도 같은 진단을 받았죠. 응급으로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어린 탓에 결국 의사와 상의해 최대한 조심하면서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텨보자는 결론을 냈어요. 그때 제 아이들 나이가 고작 2살, 4살이었거든요”
위승환 피디는 그때부터 술과 담배를 끊었다고 말한다. 충격을 받아 회사에 사직서도 썼다는 그는 막상 병이 생기고 난 후 뒤를 돌아보니 20여 년 동안 자신이 해놓은 일은 정작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아프게 새겨지더라는 말도 덧붙인다.
“아내는 내가 힘들어했던 시간동안 말없이 곁을 지켜줬어요. 그리고 오랫동안 부은 적금을 깨서 평소 타고 싶어 했던 차를 사줬죠. 그런 아내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고맙고 눈물 나요. 여전히 일이 많아 쉽진 않지만 지금은 일을 한 템포 늦추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기남방송 개국 멤버로 예전보다 많은 책임을 짊어진 위승환 피디, 현재도 현장에서 수많은 행사들을 치러내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위승환 피디는 요즘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안전’이라며 말한다. 또 시민들이 방송이나 언론의 역할을 잘 알아서 이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며 이천에서의 행사 중계방송 방송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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