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락이 생긴 후 따뜻함 많이 느꼈죠”

 

쌍용차 해고 후 실낱같은 희망 7년째
내 경험으로 타인에게 도움 되고 싶어

 

 
한 가정의 가장이 정규직으로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건 취업문이 좁은 우리나라에서 정규직으로의 재취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며 가족들의 생활이 갑자기 불안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건 개인의 상실감은 제쳐두더라도 한 가정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다.

외면과 상처, 떠올리기 싫은 지난 6년
“투쟁하며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6년이라는 시간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 중학생이 될 정도의 긴 시간이잖아요. 우리 잘못으로 받은 해고가 아닌 만큼 다시 복직하게 해달라고 매달려온 시간들이 때로는 생각하기 싫을 만큼 지긋지긋 하죠”

2600여명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의 권지영(41) 대표는 지난 시간들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낸다. 그 많은 상처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할 만큼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앳돼 보이는 얼굴 이면에서는 어두운 그늘이 여지없이 읽힌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집으로 날아온 해고통지서를 받았고 그 즉시 가족들의 삶은 막막해졌어요. 그때 딸아이가 10살이었고 아들아이가 4살이었는데, 심장이 쿵쾅거리고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당장 들어갈 돈도 많은데 월급이 끊기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회사가 어려워 해고하는 거라면 월급을 조금만 받을 테니 그냥 있게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도 그 말은 그냥 묵살 당했죠”

권지영 대표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들이 남편들의 해고투쟁에 함께 나서야 했던 이유를 묻자 3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정규직 직장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으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절박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가족들은 해고를 철회해 달라며 지역 국회의원을 찾아가 사정도 하고, 촛불문화제도 열고, 1인 시위도 해가며 도움을 얻기 위해 몸부림 쳤다.

 

아이들에게로 이어진 상처의 흔적들
“해고자 대부분이 직장 때문에 평택에 모인 사람들이라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위에 나가야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더라구요. 당시는 그것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절박했지만 지금은 그게 가장 후회스런 일이 되었죠”

이웃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30대 중반의 주부가 험한 투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투철한 신념 때문도 아니었고 민주와 비민주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건 오직 가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절박함 때문이었다.

“해고노동자 가정의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총이나 칼을 선호하면서도 경찰에 반발하는 모습, 건강한 성인 남성을 두려워하는 모습, 부모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모습 등 이상 징후들을 보였어요. 아이들은 경찰제복만 봐도 무서울 텐데 그런 경찰이 엄마 아빠를 제압하거나 헬기가 낮게 떠서 공포감을 조성하며 최루액을 뿌렸으니 그게 아이들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해요”

권지영 대표의 남편은 해고 이후 두 달 정도 구속됐다 나온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 일용직으로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 역시 직장을 구해 일하고 현재는 와락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안정되지 않은 삶을 이어가는 건 여전하다고.

 

 

‘와락’에서 받은 치유, 세월호에 내밀다
“참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어요. 해고 당사자들은 조직에서 제외됐다는 상실감과 내부에서의 갈등, 경제 위기 등으로 26명이 자살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내들은 아내들대로 가정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몸부림쳤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상처를 받았으니 어느 가정도 온전했다 말하기 어렵죠. 그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심리치유센터 ‘와락’이었어요”

‘와락’은 모든 상처를 껴안는다는 뜻과 편하게 누워 쉰다는 두 가지 뜻을 가졌다.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은 와락에서 심리치유를 받았고 그곳을 찾은 문화예술단체·시민단체·학생·시민들과 아픔을 함께 나눴다. 권지영 대표는 그때서야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사람은 바로 이런 힘으로 사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놓는다.

“얼마 전에는 세월호 가족 분들에게 직접 지은 따뜻한 밥과 반찬을 싸서 갖다드렸어요. 그런데 차마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구요. 그저 ‘밥해왔으니 한술 드세요’ 라는 말만 전했죠. 우리가 아픔을 당해보니 그분들의 마음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지만 우리와는 또 다른 아픔이라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구요”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정말 패배자가 될 것 같아 한 번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다는 권지영 대표, 내일이면 다시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막상 복직투쟁을 그만 두는 것이 쉽지 않다는 권지영 대표는 지금은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끈을 잡고 있는 심정이라며 말을 마친다. 아직은 회사 측과 타협여지가 남아있는 만큼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여전히 긴장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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