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학문‘세계로 열려 있어야’

평택시사신문에서는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와 함께 제2회 민세상 수상자와의 특별인터뷰를 추진해 첫 번째로 김지하 시인과의 인터뷰를 게재했다.(본지 21호 3면 보도, 2012년 5월 9일자) 이번호에는 그 두 번째로 조동일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문학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과 인문학의 정체성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민세상 수상 소감과 최근 근황, 한국학 발전에 대한 제언과 한국사회에 던지는 고언을 통해 나타난 조동일 교수의 철학을 정리해본다.

■ 민세 안재홍은?
“상층과 하층,
좌우익을 넘어선
민족의 학문을 주창한 분”

상을 너무 자주 받아서 면구스럽습니다. 사실 작년만 해도 상을 셋이나 받았어요. 상이라는 것은 누가 주느냐가 중요한 것인데 이번 상은 민세 안재홍 선생의 이름으로 받는 상이어서 더 영광스럽고 과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민세 선생은 정치인이고 언론인이면서도 학자로서 학문의 길을 그분만큼 뚜렷하게 밝혀준 분이 과연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그 뜻을 확고히 한 분입니다. 상층과 하층, 나아가서는 좌우익의 대립을 넘어선 민족의 학문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민족의 학문이면서 세계의 학문, 세계의 학문이 민족의 학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민세 선생의 주장에 적극 공감하고 그런 학문을 하고자 했던 분에 남창 손진태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왕조 중심의 역사학으로부터 민족의 삶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문화사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남창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국문학을 공부한 분에 도남 조윤제가 있습니다. 그 분도 민족정신의 구현처로써 국문학을 연구하고 이와 같은 사조를 다루는 것을 그의 의무로 삼아서 문학사를 서술했습니다.
저 자신을 학문의 족보로 말하면 조윤제의 손제, 즉 제자의 제자로서 조윤제 선생의 위업을 잇는 것을 큰 과제로 삼고 문학사를 써왔습니다. 민세 선생의 학문에 대한 방향 제시가운데 민족적이면서 세계적인 학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조윤제나 손진태 같은 분이 미처 그에 호응하는 업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 과제는 제가 건너뛰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한국문학에서 동아시아 문학으로 세계문학으로 나가면서 또는 세계적인 관점에서 우리 문학을 이해하는 쪽으로 학문을 하면서 민세 선생의 방향제시가 너무나도 옳았고 그동안 그것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필요한 과업을 담당하려고 노력해왔다 생각합니다.
민세 선생은 정치인이나 언론인으로도 높이 평가되지만 학문의 방향제시자로서 미래를 예지하고 학문을 이렇게 해야 된다고 길을 연 분으로서 오래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며 그 과업을 이어야 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문학의 위기 타개
“인문학문은 창조적 작업에
자연학문과 사회학문을 보태
학문 전체를 바로잡는 큰 길 가야”

근래 학문론이란 책을 내놓았습니다. 인문·사회·자연을 망라한 전체 학문의 총괄적인 의의랄까 방향제시랄까 각 층의 총론을 저술한 책입니다. 각자의 의견이 있겠지만 여러 학문을 총괄하는 학문총론은 인문학문의 소관이라 생각합니다. 인문학문 사회학문 자연학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부터가 학문총론의 과제입니다.
과학은 전문가의 영역이지만 학문은 전문적인 연구와 일반적인 관심사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각성을 하면서 학문 총괄론을 이룩하는 것이 인문학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자연학문은 자기들이 잘나가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서 우월론의 독선에 빠져 있고 사회학문은 사회현상을 널리 살핀다고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가져다 옮기는 것을 능사로 해요. 이러한 것을 모두 넘어서서 학문은 무엇이며 왜 소중하고 어떤 자세로 누가 해야 되느냐, 학문을 하는 능력을 따로 가지고 있느냐, 학문을 하는 방향과 진로는 어떤 것이냐, 학문에 생기는 어려움은 무엇이냐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야말로 인문학문의 가장 큰 사명이죠.
왜 세상에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얘기되느냐 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의 위상을 낮추니 비참하게 된 거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흔히 무슨 교양강좌 혹은 시민강좌 등을 하면서 자기 길을 찾고 위신을 세우려 하지만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 없이 이미 있었던 지식이나 매우 오래된 내용을 가지고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것은 마땅하지 못해요.
학(學)을 해야 문(文)이 있는데 학(學)은 내놓지 않고 문(文)만 하니까 상식적인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반복적인 이야기를 하고 마는 것이 큰 문제죠. 인문학문은 창조적인 학문의 작업을 하고 자연학문, 사회학문까지 보태서 학문 전체를 바로잡는 큰 길을 여는 일을 해 스스로 유용하고 훌륭한 학문임을 입증한다면 위기란 것은 있을 수 없죠.

■ 다가올 시대는
“지방, 국가, 문명권,
세계 등이 주체가 된
사중주권의 시대가 올 것”

중세학문은 문명권 단위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근대는 민족국가끼리 국가단위 학문이 이뤄져 문명권의 동질성과 함께 지방의 독자성도 부정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근대 국가학문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문명권학문, 세계학문으로 확대돼 나가야 하며 한편으로는 지방학문으로 나가야됩니다. 이는 세계지방화시대의 새로운 학문을 해야 된다는 것으로 하나는 크게 가고 하나는 작게 가는 것이지만 둘 다 국가학문의 독점적인 타당성을 제어하고 상대화하는 양쪽작용이죠.
근대는 민족국가 혹은 국가라고 하는 단일주권 시대였다면 다음 시대는 지방, 국가, 문명권, 세계 등이 주체가 된 사중주권 시대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너는 뭐냐 라고 물을 때 나는 어느 지방 사람이고 한국인이고 동아시아 사람이고 세계인이라고 답하는 네 가지를 다 균등하게 가지는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죠. 학문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방향을 제시하고 모형을 보이고 하는 것이 또한 인문학문이 앞장서 해야 할 과제죠.
지금 당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중세에 대한 재인식과 지방문화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를 통해서 근대의 편향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거죠.
사회학문은 아직 거기까지 작업을 하지 못하고 민족국가의 한계라든가 해체에 관한 서양 사람들의 이야기를 옮기기는 잘하지만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인식이 없고 지방학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아직 못하고 자연학문은 더욱 그렇죠.

■ 천하의 중심은 평택
“도시와 농촌,
지방과 수도권,
한국과 세계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위치가 평택”

수도권과 지방 중간의 균형을 잡는 곳이 평택입니다. 도시와 농촌 두 가지 성격을 다 가지고 있어요.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이면서 세계로 통하는 평택항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서울도 직접 세계로 열려 있지는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서울 위에 평택이 있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그런 인식을 통해서 천하의 중심을 잡아야할 곳이 평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중심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중심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중심으로 설지 변방으로 설지가 결정되는 것이죠.
상극적인 것을 한꺼번에 지니고 있고 그 중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심입니다. 평택은 이러한 여건을 모두 지녀 도시와 농촌, 지방과 수도권, 한국과 세계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위치에 있지만 이에 대한 인식과 학문적인 자각이 아직 교육이나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택에 사는 분들이 이러한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좋은 조건이라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어서는 곤란하죠. 곳간에 많은 보화가 쌓여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깡통 들고 동냥 다니는 사람이 있거든요? 평택은 척박한곳, 변두리,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 이라는 등 자학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정말 우스운 이야기죠.
평택은 저에게도 낯선 곳만은 아닙니다. 기억은 전혀 없지만 개인적으로도 꼭 70년 전 제가 세 살 때 아버님 직장이 평택에 있었던 탓에 몇 년간 살았었죠.

■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우리 내부에서는
아무리 대단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것,
참여문학과 순수문학 합쳐야”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은 합쳐져야 됩니다. 사람들은 합치려는 마음도 없이 재미없는 참여문학을 하거나 생각이 꽉 막힌 순수문학만 고집하고 있죠. 이는 결국 시야의 문젠데 우리나라 작가들이 노벨상을 못 받는 것은 작품이 너무 폐쇄돼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는커녕 동아시아적 시야도 없이 자기민족과 자기나라 자기고장만 보고 있죠. 우리 내부에서는 아무리 대단해도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것이죠. 이를 반증하는 것으로 우리 속에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 있지만 우리나라의 가장 진보적인 작가라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변해주는 소설을 쓸 생각을 안 합니다. 어느 땐가는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말을 배워 우리글로 훌륭한 작품을 쓰는 날이 올 겁니다. 그런 사람이 한국어로 외국인 노동자를 대변하는 소설을 썼을 때 우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겁니다. 왜 우리 작가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지, 우리나라에서 계급적으로 가장 진보적이라는 작가들이 민족적으로는 가장 반동적이죠.
이런 상황에서 밖에 나가서 우리 작품을 평가해달라는 것은 내가 전국체전에서 1등 했으니 올림픽에 가서 메달을 달라는 것과 같아서 남들의 심금을 못 울리는 것이죠.
아프리카 작가들이 왜 대단하냐면 그들은 자기 지방을 말하고 자기 민족을 이야기하면서도 세계의 고민이 거기 들어 있죠. 우리에겐 세계의 고민이 없어요. 세계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학문론이라는 책을 씀으로서 일단 내가 하고자하는 일은 마무리했어요. 그 책에 이렇게 썼지요. “학문은 끝이 없지만 사람의 생은 마무리가 있어야 한다. 일흔셋이라는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일단 나는 마무리 한다”라고요. 그렇다고 앞으로 아무것도 안하느냐하면 그건 아닙니다. 각종 강연들이 여럿 잡혀 있어 분주히 돌아다닐 계획입니다. 하지만 일단 가장 큰 목표는 일단 마무리 했으니 나머지는 덤이고 부록이죠.

● 조동일 교수는?
1939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국어국문학과에 다시 입학해 학위를 취득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영남대학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계명대 석좌교수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전5권의 <한국문학통사>를 비롯해 <한국소설의 이론>, <한국문학사상사시론>, <문학연구방법>,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동아시아문학사 비교론>, <세계문학사의 허실>, <인문학문의 사명>, <우리 학문의 길> 등 120여 편의 저술이 있으며, 최근에도 <학문론>을 집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2003년 한불문화상, 2004년 녹조근정훈장, 2005년 제1회 경암학술상, 2011 제22회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학술연구상과 제1회 벽사학술상, 제2회 민세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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