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 “이젠 행복이 뭔지 알아요”

두 다리 없지만 세상 속에 어울리며 살아가
말기 암이지만 아름다운 세상 다시 보게 돼

 
부부라는 이름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 허물을 가장 잘 덮어줄 거라는 믿음으로 혹 상대에게 모진 아픔을 주고 있진 않을까. 여기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부부가 있다. 때로 다투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는 평범한 부부,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부부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

기꺼이 두 다리가 되어준 아내
“23살의 나이에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많이 좌절했죠. 폭탄이 터지고 정신이 들고 보니 이미 두 다리는 사라진 뒤였거든요. 젊은 나이에 다리도 없이 사느니 죽는게 낫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차츰 진정이 되고 난 뒤에도 27살이 될 때까지 결혼에 대한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어요. 당시 21살이었던 제 아내를 만나기 전 까지는요”
조영호(65) 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말을 잇는다.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때에도 감히 결혼까지 생각은 할 수 없었다는 영호 씨는 자신을 받아 준 아내가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고.
“장애인으로 살면서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긴 싫었습니다. 무엇이든 남의 손 빌지 않고 해내고 싶었고 남들과 더불어 똑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우울한 얼굴로 방에만 있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장애인 차량이 처음 나오던 때 서울까지 가서 운전교육을 받았죠”
그는 10킬로에 달하는 의족을 착용하고 거뜬하게 걸어 나가 자동차를 운전한다. 정상인 보다 몇 곱절 많은 투자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길 멈추지 않는다. 노래교실도 다니고 컴퓨터 교실도 다닌다. 두 다리 없이 움직이는 그를 보다가 의족을 착용하고 선뜻 일어나는 그를 보니 그가 과연 장애인으로 사는 그가 맞나 싶다. 그러나 무릎 한참 위쪽으로 잘린 다리에 무거운 의족을 달고 걸어야 한다는 건 보통 의지로는 힘든 일, 그럼에도 그가 힘든 내색 없이 씩씩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21살의 나이에 자신에게 시집 와 갖은 고생하며 살아온 아내 때문이다. 아내는 1남 2녀의 자식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시집 장가 보내놓고 살만해 지니까 덜컥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휠체어타고 병간호 하는 남편
“남편이 많이 도와줘요. 아픈 저를 대신해 휠체어 타고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자동차로 서울 삼성의료원까지 절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죠. 밥물은 저 때문에 꼭 버섯이나 갖은 약초를 달인 물로 하구요. 성격이 참 밝은 사람이에요. 저도 처음 이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런 밝은 성격에 끌렸던 거 같아요. 물론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를 하셨기 때문에 막내아이를 임신하고서야 결혼식을 올렸지만 말예요”
아내 최정자(60) 씨는 일을 할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평생 안 해본 일이 없다고 말한다. 당시는 아이들 데리고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과수원 일도 하고 외국인 빨래도 하고 포장마차도 하는 등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매달렸다고. 때론 궂은일로 습진이 심해 고무장갑을 벗자마자 손에서 피가 흘러도 결코 일을 멈출 순 없었다. 그런 그녀가 7년 전 건강진단을 통해 암 소견이 보인다는 말을 듣고 병원을 찾았으나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듣고 그대로 방치했다가 2년 전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수술 하던 도중 췌장까지 전이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부모님께 제 선택으로 인해 죄를 많이 지었다는 생각에 그저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았죠. 말기 암 판정을 받고 나서는 세상이 참 원망스러웠어요.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렸을까. 항상 착한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하면서요. 그런데 막상 첫 수술날짜를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병원 문 앞에 있는 하얀 목련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어요. 매일 그냥 지나치던 목련이 왜 그렇게 예쁜지, 그리고 하늘은 어쩌면 그렇게 파란지, 이마를 스치는 바람은 어쩌면 그렇게 부드럽고 따스한지. 세상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그동안 느끼지 못하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요”
그녀는 현재 수술한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음식조절도 하고 얼굴빛도 많이 좋아졌다. 항암치료로 다 빠졌던 머리도 다시 나기 시작하고 밖으로의 활동도 조금 자유로워졌다.

서로가 간절히 필요한 부부
“아직은 아내가 더 건강해야 해요. 그래야 저도 살 수 있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죠. 아내가 요즘처럼만 건강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부부가 서로 힘이 된다면 잘 이겨낼 수 있겠죠”
조영호 씨는 늘 밝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게 아내를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재주가 좋은 그는 장애인들의 컴퓨터가 고장 난 것도 찾아다니며 수리해준다. 그리고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사회에서 어울려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평택에서 열리는 평택꽃봄나들이 노래자랑에도 나가고 장애인 가요제나 복지TV 방송에 나가 받은 상금은 아내를 위해 선물하기도 한다.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함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조영호·최정자 부부. 이들이 부부로 살아온 날들은 다른 부부들과 다를 바 없이 다사다난하지만 이들이 특별한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달리 애잔하고, 서로의 존재가치를 시시각각 느끼며 살아간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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