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죠”

 

대형백화점 과장에서 중소기업 배송기사로
내 인생의 주인은 나, 도전은 계속 될 터


 

 

‘후회 後悔’, 뉘우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이며 훗날 같은 일에 부딪혔을 때 예전보다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한다는 것은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성숙의 과정일지 모른다.

일중독으로 살았던 젊은 시절
“중앙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뉴코아백화점에서 관리직으로 일했어요. 브랜드 업체를 선정하고 매장을 오픈시키는, 말하자면 MD역할이었죠. 반포지점에서 7년, 분당에서 1년, 평촌에서 1년을 근무했는데 IMF를 겪으면서 9년 만에 과장 직함을 달고 회사를 그만두게 됐어요. 업무성과를 내기 위해 주말도 반납하고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던 시절이었죠”
팽성읍 노와리에 소재한 대양플라텍에서 물류배송업무를 맡고 있는 송인성(51)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본인 스스로도 당시를 ‘갑’의 위치에 있었다고 표현하는 그는 일을 하느라 가정보다는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말한다.
“퇴사 후에는 삼성생명 수원인계지점에 부지점장으로 일하게 됐어요. 관리직으로 일했던 경험이 인정을 받은 거죠. 설계사들을 뽑고, 교육시키고, 보험체결에 관한 업무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는데 효율성 없는 윗선이 무너지면서 9년을 일한 그곳에서도 그만둬야 했어요. 생각해보니 모든 직장에서 꼭 9년 정도씩을 일한 셈이네요”
송인성 씨는 당시 아내에게 1년 안에 충분한 여가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과 부동산 등기를 아내 앞으로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아직까지 지키지 못했다며 말꼬리를 흐린다.

노력이 물거품, 세상에 속다
“아버지는 늘 ‘엿판을 짊어져도 네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그 말이 가슴에 꼭 와 닿은 거죠. 그래서 2007년에 고향 평택으로 내려와 안성톨게이트 앞에서 건축자재들을 취급하는 자영업을 시작했어요.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이 강했고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는 삼성에서 배운 정신이기도 했구요”
송인성 씨는 가진 돈을 다 털어 40대 중반 무렵 사업에 투자했고 처음부터 운이 좋다고 생각할 만큼 큰 공사에 자재들을 납품하면서 신나게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발행한 채권을 회수하지 못하고 갈수록 악성채권이 늘어나면서 또 다시 9년 만에 사업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평택이 갈수록 신도시가 되어간다고는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는 저와 같은 영세업자들의 눈물이 수도 없이 많이 담겨 있다는 걸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예요. 큰 회사는 건설공제보험으로 보전을 받을 수 있지만 하청의 하청까지 몫이 돌아오진 않더라구요. 가진 것 다 잃고 빚까지 졌지만 그대로 무너질 수 없었던 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고, 아내가 살뜰하게 가족을 돌보며 나보다 더 씩씩하게 버텨줬기 때문이었죠”
송인성 씨는 지난 일을 돌아보며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만 하며 바쁘게 뛰어다니는 동안 가족들을 살뜰히 챙기지 못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그는 모든 상처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수십 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건 아닌가 싶어 후회가 된다는 말도 전한다.

다시 일어설 내일을 꿈꾼다
“작년 7월에 건업사를 그만둔 이후 평택상공회의소 중장년 일자리교육을 받으러 다녔어요. 그때 지금 제가 다니는 ‘대양플라텍’ 회사가 눈에 들어온 거죠. 무엇보다 25년 역사를 가진 회사라는 점이 가장 믿음직스러웠어요. 저도 직장을 다녀보고 사업도 해봤지만 그 긴 시간을 직원들 월급 줘가며 버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송인성 씨는 작년 9월, 팽성읍 노와리에 있는 ‘대양플라텍’에 배송기사로 취업을 했다. 과장, 부지점장, 사장까지 관리직으로만 잔뼈가 굵은 그에게 많지 않은 월급을 받는 ‘송 기사’라는 호칭이 어쩌면 낯설기도 했겠지만 그는 현재 이 자리가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풍파를 막아주는 사장님을 비롯한 윗선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 더할 수 없이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현 시점에서 제가 다시 꾸는 꿈은 물류 쪽에서 작은 개인사업을 하는 거예요.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할지는 모르지만 제 꿈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처음부터 성실하게 일을 배워야죠. 7시 10분에 출근해서 8시나 9시에 퇴근하는 쉽지 않은 일과지만, 일이 있고 꿈이 있으니 열심히 할 거예요”
초등학교 6학년 막내 딸아이 교육을 위해 오래 전부터 집 안에 하나씩 사 모은 동화책이 2000여권이나 된다고 한참이나 아내 자랑을 늘어놓는 송인성 씨, 재수를 하는지도 몰랐는데 혼자 꿋꿋이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간호대학에 입학했다고 알려온 큰딸에게 차마 미안한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다는 송인성 씨는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가장 마음이 아픈 존재는 바로 ‘가족’이라며 말을 잇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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