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역사나 구경거리가 될 만한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도 평택은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어디로든 떠나지 못하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택. 기차를 타고 오가며 차창 너머로 바라보기만 했던 평택을 서울 종로 - 지금은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 된 자리에 있던 동양고속버스를 타고 처음 찾은 것은 1970년 겨울이었고 버스를 내린 곳은 평택경찰서에서 역 쪽으로 가는 길  왼쪽에 자리 잡은 작은 버스정류장이었습니다
그렇게 평택과 만나 지금까지도 재랭이 고개 , 잔다리 , 됫박산 , 조개터… 덕동산…
평택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 평택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해서 정치적 격동기였던 70년대 , 80년대를 숨 가쁘게 넘으며 90년 대 중반 평택을 떠나기 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평택은 어디에 가든 잊히지 않고  그리운  아늑한 고향이 되었습니다.
교육청에서 나온 장학사가 점심시간 학생들이 가지고 온 도시락에서 밥 한 숟가락 떠내 유리 물 컵에 넣고 휘저어 일일이 쌀과 보리쌀을 가려내 숫자를 세며 혼식비율을 감시 감독하던 어두운 시절, 중학교 아이들이 가정형편이 어려워 한 학급에 7-8명씩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던 가슴 아픈 날들, 새 학기 아이들 가정환경조사서에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 생각만 해도 지겨운 밀가루라고 썼던 암울한 시간, 그 시간에도 저는 평택과 함께 숨 쉬고 있었습니다.
다른 고장 사람들에게 평택은 송탄 - 쑥고개? (숯고개? 숲고개?) 미군부대와 안정리, 기지촌 밖에 아는 것이 없고,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을 개간해 만든 간척지 논에서 거둔 ‘아끼바레’ -추청쌀 외에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던 인구 3만 명의 작은 고장이었던  평택읍이 아시아와 세계로 향하는 거대한 물류중심 평택항을 가진 인구 43만을 헤아리는 거대도시가 된 지금도 어깨를 스치며 걷던 좁은 골목길 옛 정은 변함없이 따듯하고 아늑해 낯익은 얼굴, 그 날 그 시절이 더욱 그리운 평택의 지나간 기억들을 떠올리며 평택과 평택사람들이 살아온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지면을 마련해주신 평택시사신문에 감사드립니다.

- 2012. 칠월
       ‘노시재老枾齋’에서 이동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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