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이혼 세 번의 결혼 ‘오뚝이 인생’

한국 남자들, 모두 술 중독자로 보여
“제가 택한 길이기에 포기할 수 없어”

 
“처음 결혼생활을 했던 남편과는 19년을 함께 살았죠. 단 한 번도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역할에 충실한 적이 없었지만 이게 숙명이려니 하고 견디며 살았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더군요”
2004년 문 모씨와 재혼해 한국에 들어온 이화자(53)씨는 중국 조선족 출신이다.
첫 결혼 전까지 그녀는 일제강점기 때 살 길을 찾아 중국에 이주해온 그녀의 할아버지가 정착한 길림성 백두산 기슭의 한적한 농촌 마을에 살았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도시로 나왔지만 책임감이 없던 남편은 연일 술로 허송세월을 했고 오랜 결혼생활 뒤에 남은 것은 사람에 대한 원망뿐이었다. 결국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며 두 아이를 홀로 키워온 지 8년이 흐른 어느 날 그녀에게는 또 다른 전기가 찾아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국인 목사님이 찾아와서 괜찮은 남자 한분이 있는데 재혼할 생각이 없느냐 묻더군요.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교회도 잘 다니는데다가 술·담배는 전혀 안하는 성실한 사람이고 아이 하나가 있다더군요”
“혼자 살아가기엔 세상이 만만치 않았고 아이들 교육이나 생활면에서 보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목사님이 소개해주는 분이면 믿을 수 있겠다 싶기도 했구요”
그러나 2004년 11월 정든 고향을 떠나 부푼 꿈을 안고 한국 땅을 밟은 그녀를 기다린 것은 온통 거짓투성이의 현실과 반복된 아픔이었다.
“집은 조그만 전세였고 직업은 막노동 이였죠. 그나마 술·담배는 안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만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1개월 뒤부터 파출부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살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녀의 짧은 행복은 3개월이 지나지 않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직장을 알아보겠다고 나간 남편이 다음날 새벽에 술에 만취된 상태로 귀가한 것.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남편은 일을 나갈 생각은 안하고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처음엔 저와 결혼하기위해서 속인 거였더군요. 물론 절 소개해 준 목사님도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고요. 하지만 방법이 없더군요. 낮에 교회를 다니고 밤에 식당에 나가 야간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주민등록이 나오질 않아 제 이름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없어 남편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해 월급을 받았었는데 어느 날 중국에 있는 아이들 학비를 부치려고 통장을 보니 2000원만 남아있더군요. 남편이 현금카드를 만들어 전부 찾아 술값으로 써버린 겁니다”
결국 충격을 받아 쓰러진 그녀는 한동안 병원신세를 져야할 정도로 극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다시 한 번 남편을 설득해 알코올중독치유센터를 찾아 치료를 위한 입원을 권하는 등 살아가려는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소개해준 목사님 원망도 많이 했죠. 하지만 어떡합니까. 제가 택한 길이니 포기할 수 없었죠. 시부모님을 찾아가 상황을 이야기 하고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전세금과 시댁이 마련해준 돈을 합해 송탄에 150평의 한정식 집을 차려 제법 장사가 잘 되는가 싶던 차에 남편의 술버릇은 또 재발하고 만다.
“버는 대로 술값으로 가져다 써버리더니 나중엔 재료 살 값도 남겨놓지 않더군요. 더구나 의처증까지 생겨 세간을 부수고 폭력까지 휘둘러대는 등 개선은커녕 점점 악화만 되어 갔습니다, 병원에 입원시켜도 2주일이 지나지 않아 탈출해 그때마다 더 큰 횡포를 부렸습니다”
사업을 접은 후 지인의 소개로 부부가 같은 회사에 취직해 한동안 별 탈 없는가 싶다가도 돈이 조금 모일라치면 남편의 술버릇은 다시 도지곤 했다. 이 같은 끝없는 악순환이 이어지길 2년여, 결국 그녀는 두 번째 이혼을 하게 된다.
“한국 남자들은 전부 술 중독자요 나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앞날이 캄캄했죠”
그녀를 아는 지인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치유 방법은 단 하나, 새 삶을 찾아주는 것이었다. 소개를 받은 이는 평택시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김수철(60) 씨로 아직 출가 안한 두 자녀의 아빠였고 자그마한 집도 한 채 마련해 성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술을 조금 드시긴 하지만 무척 성실하고 좋은 분입니다. 저에게 잘해 주시고 덕분에 2009년엔 국적취득을 해 중국에 있는 아이를 데려올 수도 있었죠”
성실한 기독교인인 이화자씨에게 요즘 기도 제목이 하나 더 생겼다. 올해 정년을 맞아하는 남편 김 씨가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돈을 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많은 돈을 벌지 못해도 소일삼아서 움직일 수 있는 곳이라도 남편에게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토록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원출입국관리소에서 국제결혼 가정상담사로 봉사를 시작한지 벌써 4년이 넘은 그녀에겐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다문화인들을 위해 좀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최근 원평동주민자치센터에서는 그녀를 베트남, 중국, 일본 다문화 주민자치위원으로 위촉하는 등 그 성과가 조금씩 빛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결혼이주자를 대하는 눈초리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아직도 그리 살갑지는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무조건 이런 것도 못하니? 하지 말고 좀 더 사랑으로 대해주면 좋겠어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낯선 땅에서 좌절하지 않고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겐 한민족 특유의 ‘끈질김’의 유전자가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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