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년 유구한 역사의 ‘진위초등학교’
격랑의 세월을 넘어 평택교육의 미래를 찾다

▲ 진위초등학교
▲ 진위보통학교 학생들의 운동회(1955년)
한 세기도 훨씬 넘는 무려 113년의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가 평택에 있다. 이 초등학교가 설립된 이후 수많은 졸업생들이 배출됐으며 지금도 많은 졸업생 동문들이 모여 추억을 되새기고 지난날의 스승들을 그리워한다. 평택에 있는 학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진위초등학교는 긴 역사적 전통 만큼이나 학교 곳곳에서 평택 교육의 살아있는 흔적과 만날 수 있다.

근대 평택교육의 발상지 ‘진위’
진위는 예로부터 진위현이 있었던 곳으로 평택지역 행정과 교육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진위는 교육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조선 초기의 진위향교가 있고 평택시 최초의 공립소학교인 진위소학교가 개교되는 등 교육적으로 역사가 깊은 고장이다.
평택지역의 교육기관으로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팽성읍 객사리와 진위면 봉남리 두 곳에 설치된 향교가 있어 이것이 지방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정신적인 중심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880년대 들어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는 문벌, 양반, 상민 등의 신분타파라든지 관제개혁 등 근대적 개혁체제를 갖추었고 경제적으로도 근대적 경제체제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개혁정책은 교육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존의 예조에서 관할하던 교육행정 업무를 학무아문(學務衙門)으로 이전해 근대적인 교육행정 업무를 담당케 했고 조정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근대적 교육을 적극 추진했다.
1886년에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은 귀족 자제만을 입학시켜 각종 근대학문을 가르쳤지만 그 제약성 때문에 1894년에 결국 폐교되고 1895년에 정부가 내세운 각 부·군(府·郡)의 만 7세에서 15세까지의 아동을 취학시키는 소학교령을 근거로 관·공립학교가 설립됐으며 사립소학교는 민족 선각자들에 의한 학교와 기독교계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가 각각 세워져 운영됐다.
진위공립소학교 탄생에 관한 기록이나 근거는 특별히 찾아볼 수 없으나 관보 1256호에 진위학교 최초의 교원인 ‘이교홍이 진위군 공립소학교 교원, 서판임관 6등’으로 발령된 날짜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1899년 2월 진위군 현내면(현 평택시 진위면)에 3년제 진위소학교가 설립되어 진위군내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로서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校舍)가 없어 객사(客舍)나 향교 내 문묘(大成殿) 등을 전전하며 수업을 해 오다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06년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의해 을종공립진위보통학교로 개칭하였고 한일합방 이후 1911년에 공포된 신교육령에 따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오늘의 진위초등학교다.

▲ 진위보통학교 학생들의 수업-땔감에 대해(1950년)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어온 교육현장

1905년 한일협약의 체결로 인해 국가의 주권행사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1906년 교육법 개정령에 이어 통감부가 설치됐다. 1906년 ‘보통학교령’에 의해 진위공립소학교를 공립진위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수업연한도 5~6년이었던 것이 4년으로 단축됐으며 교과과정에 일본어를 추가해 전 학년에 걸쳐 매주 6시간씩 편성 운영하는 등 교과를 통해 친일교육을 강화했다.
당시 공립진위보통학교 교원은 1908년 융희 2년 1월 28일로 교원 정범시가 본과 훈도 판임관 3등으로 임명됐으며 같은 날짜로 부교원 이필선이 부훈도 판임관 5등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10년 4월 21일자 관보에 의하면 당시 진위군수였던 김복규가 진위보통학교 교장으로 겸임발령 받아 그가 공립진위보통학교의 최초의 교장임을 알 수 있다.
일제는 1919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했는데 조선총독부는 1920년 11월 9일자 칙령 제529호로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고 지방 실정에 따라 4~5년제의 보통학교를 둘 수 있게 했으며 1922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조선교육령을 전반적으로 개정하여 동화주의(同化主義) 교육을 더 강화토록 했다. 그러나 교육의 실제에 있어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기준을 엄격히 정해 한국인에게 민족적 차별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현재 진위초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김병희 교장은 “일제 때 학생들에게 몰래 숨어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깨우쳤던 교사 중에 조남직 선생님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그분에 대한 은덕을 못 잊어 사후에 비석을 세워 기리고 있다”며 “현재 진위초등학교에 만들어진 100년 동산에 가면 비석을 통해 그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한편, 일제의 주권침탈에 의해 교육받을 권리를 제한받았던 우리 민족은 해방이 되자 새로운 교육열에 불타올랐는데 당국은 특권층에만 열려있었던 학교의 문호를 개방하고 학령아동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기 위해 초등교육의 의무교육제도화를 서두르게 되었다. 비록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이 되지 않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 진위초등학교 연혁지
진위초교 평택교육의 역사
이러한 역사적 시대를 겪어온 진위공립소학교는 정식 학교건물이 없어 문묘와 객사를 오가며 수업을 하다가 개교한 지 13년 후인 1913년에 지금의 학교건물 부지에 정식 교사(校舍)를 세우면서 보통학교로의 규모를 갖추게 됐다. 하지만 학교가 자리한 터는 진위객사가 위치했던 곳으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훼손한 아픔의 현장이기도 하다.
1899년 2월에 진위소학교, 1900년 4월에 진위공립소학교, 1906년 9월에 공립진위보통학교, 1911년 11월에 진위공립보통학교, 1938년 4월에 진위공립심상소학교, 1943년 4월에 진위공립국민학교, 1950년 6월에 진위국민학교, 1996년 3월에 진위초등학교로 명명해 온 진위초등학교의 명칭변경만 보아도 평택 초등교육은 물론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 내에서 네 번째로 개교했으며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단기간 동안 공립학교가 된 진위초등학교는 당시 평택이 매우 작은 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위치나 주민들의 간절한 필요성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개교 이래 대한민국 현대사의 모든 역경을 헤쳐 오면서 국가의 인재를 길러낸 유서 깊은 진위초등학교는 교가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진위학교를 감싸고 있는 무봉산이 비바람을 막아주고 학교 앞을 흐르는 진위천의 깨끗한 기운을 받아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113년이라는 세기를 지나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가는 동안 어느새 9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해 낸 진위초등학교. 그러나 그런 역사를 현재의 아이들이 직접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충분치 않아 현재 오래된 상장이나 앨범, 깃발, 우승컵, 수업교구 등의 사료를 모아 전시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진위초등학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미래의 평택을 이끌어낼 꿈나무들에게 지역과 학교의 역사에 대한 교육을 통해 새로운 평택 교육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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