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대추리 황금들판이 눈에 선해요”


태어나 자랐던 팽성 대추리 넓은 들
미군기지 이전으로 고향 추억 잃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詩 <향수>
중에서 -

가난한 소작농에서 2만평 대농으로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4남매가 살았어요.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소를 먹일 수도 없었지요.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는 소작하던 논 15마지기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8마지기는 둑이 터져서 갯벌이 돼 버렸고 나머지 7마지기만 간신히 남아 있었어요”
김석경(88) 어르신은 지금은 미군기지 확장으로 편입된 팽성읍 대추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곁눈질로 농사를 배웠고 열일곱 살 되던 해부터는 소를 몰고 마음대로 농사를 지었다는 어르신은 당시 동네 어른들이 ‘소도 어리고 애도 어린데 농사는 잘 짓는다’고 칭찬해 주셨다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신다. 
“2월이 되면 아내랑 둘이 마당에서 하루 종일 가마니를 짰어요. 하루에 가마니 20장 정도를 짰는데 500개를 짜서 100개는 집에서 쓰고 나머지 400개는 장에 내다 팔아 아이들 시계도 사주고 용돈도 쓰고 그랬죠. 아내가 손도 빨랐고 솜씨가 대단했어요”
부부는 땅을 늘려가는 재미로 살았다. 한 해는 빚 얻어서 땅을 사고, 다음 한해는 농사지어서 빚 갚는 일을 반복해야 했지만 그렇게 고생해서 2만평 정도를 산 뒤에는 자신이 힘들게 고생해 본 만큼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싼 이자만 받고 쌀을 빌려주곤 했다고.

몸으로 익힌 농부의 습관
“내가 스물 둘, 아내가 스무 살이 되던 1950년에 결혼했어요. 비탈 논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경지정리 했는데 아내는 매일 밥 광주리를 이고 다녔지요. 내가 30대였을 때는 평택호방조제를 막기 전이었는데 물이 마을 근처까지 들어와서 숭어, 동어, 새우도 많이 잡았어요. 그물을 치면 고기가 한가득 잡히곤 했죠”
대추리, 추팔리, 근내리는 안성천의 물을 가둔 보에서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지었다. 강둑이 30리가량 되었는데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을 선정해 하루 쌀 2~3되를 주고 물 감독을 하게 했다. 둑이 터지면 그 사람은 나팔을 불면서 마을마다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삽이나 지게를 지고 나가 사흘 연속 둑을 막아야 했다.
“69세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시조창을 들었는데 그때부터 시조가 배우고 싶어서 무작정 송탄에 있는 시조협회를 찾아가 배웠어요. 당시 선생님은 3년 후면 졸업할 거라고 했는데 3년이 안돼서 전라도 무주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시조협회 회장도 했지요. 지금도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협회에 나가 시조를 듣곤 하는데 이젠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봐 조심스럽긴 해요”
김석경 어르신은 대추리에서 2만평 가량 농사를 짓다가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러나 지금도 대추리는 여전히 어르신 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시조협회의 회장 직을 미련 없이 내 놓은 것도 당시 미군기지 반대투쟁을 하다 지금의 팽성읍 노와리로 쫓겨나올 무렵이었다.

그리운 ‘팽성읍 대추리 141번지’
“대추리 고향마을에서는 144집이 살았는데 투쟁하면서 100집은 뿔뿔이 흩어지고 44집만 이곳 노와리로 이사 와서 함께 살게 됐어요. 보상 받고 난 후 1년 동안 아들은 장사라도 해보겠다고 며느리랑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결국엔 다시 농사를 지어야겠다며 당진에 땅을 사더군요. 지금은 아들 혼자 농사를 짓고 있어요”
봄이 되면 몸이 먼저 아는 농부이기에 김석경 어르신은 대추리를 떠나오기 전인 85세까지 농사일을 했다. 노와리로 와서도 쌈 채소나 시금치 등을 심었지만 예전 같은 활력은 느낄 수 없었고 그마저도 기력을 잃자 지금은 마을회관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소일하고 있다. 
“아내가 4년 전에 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어요. 아내가 죽은 뒤 소리 내 울지 못해서 그런지 지금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요. 남자보다 여자가 명이 더 길다는데 아내가 위암으로 먼저 떠난 걸 보면 마을을 떠나며 속을 끓인 것이 화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아내에게 일을 많이 시킨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는 김석경 어르신, 고향을 떠나온 뒤 걷기조차 힘들어진 지금, 논밭 대신 아스팔트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어르신은 지금도 눈 감으면 사진을 보듯이 대추리 고향마을이 떠오르고 그 넓은 들판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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