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여년 자장면 역사 ‘쌍성원雙盛園·홍행원鴻杏園’
행복한 추억의 대명사로 평택의 맛을 지켜오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자장면’은 그 시대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음식이다. 지금은 자장면이 흔해져서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자장면은 졸업과 입학 또는 가족의 특별한 경조사가 있을 때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때문에 자장면은 예전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어김없이 함께 떠올라 슬픔보다는 기쁨의 순간에서 머물게 하는 행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서민들에게 더 친숙한 음식이었던 자장면, 그런 자장면이 평택에서만도 어느새 90여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오며 현재까지도 대를 이어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86년의 역사, 서정리 ‘쌍성원’
1927년 서정리역 앞 일본식 2층 건물에서 개업한 쌍성원(雙盛園)은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 임일홍 씨가 처음 시작했다. 당시에는 화교들에 대해 정부의 규제가 심할 때였지만 쌍성원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자장면을 비롯한 중국음식들을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1961년 임일홍 씨의 아들인 임장록(林長祿) 씨가 구 송탄버스터미널 옆으로 업소를 이전하고 이름도 쌍흥원(雙興園)으로 바꾸어 아버지의 자장면 집을 이어받았으며 현재는 임일홍 씨의 손자인 임연봉(林蓮蓬) 씨가 서정동 1104-1번지 평택시여성회관 앞 골목에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전화번호도 처음 쌍성원이 쓰던 ‘4’번에서 이후 ‘2004’, ‘4-2004’, ‘666-2004’번으로 이어지고 있어 그 역사의 흔적을 짐작케 한다.
임장록 씨가 쌍흥원을 운영하던 당시 자장면 값은 10원, 우동 값은 15원이었는데 배가 고픈 사람은 주로 국물까지 먹을 수 있는 우동을 즐겨먹었다고 한다. 청요리라고 불렸던 중국음식의 재료를 볶을 때는 부대 안에서 나온 ‘쇼팅’이라고 부르던 동물성 기름을 쓰거나 돼지비계를 녹인 기름을 사용하고 자장면 고명으로는 무를 깍두기같이 썰어 삶은 것과 배추를 재료로 사용했다. 먹을 게 부족했던 때라서 손님들은 요즘처럼 모양을 내기 보다는 양이 많은 음식을 좋아했다.
현재 쌍흥원을 운영하고 있는 임연봉 씨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당시는 장사도 꽤 잘 된 편이라서 아버지는 8시 반이면 일어나 음식 재료를 준비하고 10시 반이면 문을 열었다고 옛 기억을 떠올린다. 자장면 집이 많지 않았던 때라 문만 열면 손님이 있었는데 아버지 임장록 씨는 설령 재료준비가 미처 되지 않았을 때 손님이 오더라도 절대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고 혹 막차 시간을 얼마 앞두고 배가고파 찾아온 사람들이 있으면 천천히 음식을 먹으라고 한 뒤 막차가 끊겨도 자신이 직접 마을까지 태워다 주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 걸인이 가게에 들어오면 당연하게 음식을 주어 주린 배를 채우게 하는 등 넉넉한 인심을 보이기도 했다.
 
 
쌍흥원의 뒤를 이어 송탄지역에서는 1950년대에 이맹춘(李孟春) 씨가 개업한 동리반점(同利飯店)이 신장리 산 5번지, K-55 미군부대 정문 옆에서 중국집을 운영했다. 1962년 이전  신장리 산 5번지 삼보극장 입구에 개업한 쌍홍원(雙鴻園, 대표 왕의은)과 1963년 신장1동 324-13번지 K-55 미군부대 앞 쇼핑몰 근처에 개업한 태화루(泰和樓, 대표 손성린)도 중국집을 운영했다. 태화루는 손성린 씨의 동생 손성기 씨, 손성기 씨의 아들인 손덕위 씨까지 이어지며 현재까지도 영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올 10월말 지산동 동안길 1번지로 이전한다.
1966년에는 홍태루(鴻泰樓)가 신장동 214-3번지 송북시장 맞은편 골목에 개업한 뒤 그의 셋째 아들인 여덕정 씨가 대를 이어 현재까지도 영업 중이며 그보다 1년 늦은 1967년에 개업한 인화루(仁和樓)역시도 왕진민 씨가 시작해 그의 외조카인 왕충복 씨가 신장동 229-3번지(지산리 좌동)에서 현재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1970년대에는 영빈루가 송탄파출소 아래에서 개업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85년의 역사, 평택리 ‘홍행원’
송탄에 86년의 역사를 가진 쌍성원이 있었다면 평택에는 이보다 1년 정도 늦은 1928년에 ‘홍행원(鴻杏園)’이라는 중국집이 평택리 100번지(본정통 구 평택경찰서 옆) 현 평택농협 원평지점 옆에서 자리를 잡았다. 홍행원을 개업한 화교 왕기무(王基茂) 씨는 이후 쌍흥원의 임장록 씨와는 사돈 간으로 맺어지는데 홍행원은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건물이 부서져 평택리 63번지로 이전했다가 이후 그의 셋째 아들인 왕본희(王本喜) 씨가 1983년에 비전동 747-20번지로 가게를 이전하고 이름도 ‘동해장東海莊)’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945년에 개업한 생금원(生金園)은 왕본송(王本松)씨가 원평동에서 평택동 35-10번지로 이전해 줄곧 영업을 이어오다가 2010년에 폐업했으며 생금원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경화원(慶和園)은 주학문(朱學文)씨가 통복동 112-15번지에서 시작해 그의 아들 주전영(朱傳英), 손녀 주경봉에 이르기까지 처음 개업했던 자리에서 현재의 소락천(笑樂天)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1960년에 개업한 개화식당은 홍행원을 개업했던 왕기무의 맏아들인 왕본동(王本東)씨가 통복동 83번지 통복시장 부근에서 문을 열어 현재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왕본동 씨는 화교협회장과 화교학교 교장으로 평택지역 화교계를 이끌어오고 있다.
이밖에도 해방 직후 원평동에서 시작한 부손관, 6·25전쟁 직후 개업한 경화루와 용성반점, 신성관, 안중옥, 만보장 등은 현재 폐업했으나 그들 모두가 평택 자장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주인공들이다.

대를 잇는 자장면, 맛도 이어져
평택과 송탄에 둥지를 튼 자장면 집은 음식이나 재료 면에서는 특별히 다른 점이 없었으나 손님에 있어서만큼은 확연하게 달랐다. 평택이 주로 서민들의 특별한 날을 중심으로 영업이 이어졌었다면 송탄은 주로 미군들을 대상으로 영업했었다는 점이다. 태화루를 운영하고 있는 손성기 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는 메뉴도 200여 가지가 넘었고 메뉴판도 영어와 한국어 두 가지를 사용했으며 금요일 저녁에는 한국 사람들은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미군들로 가득 찼다. 미군들에게는 팁 문화가 있어 음식 값 외에 한 사람당 1달러에서 5달러 씩 팁을 주는 일도 흔해 상인들 모두 한국 사람보다는 미군들을 더 반기는 추세였다. 미군들은 색깔이 까맣다는 이유로 자장면을 싫어해서 주로 탕수육과 계란말이, 볶음밥 등을 시키곤 했는데 한 번은 미군들의 회식이 있던 날 가게 안 장교들의 별을 다 세어보니 15개가 넘어 일명 ‘별들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화교들에 의해 문을 열고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장면 집은 예전에는 나무배달통에 음식을 담아 걸어 다니며 배달하다가 점차 철가방에 자전거, 그리고 플라스틱 통에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평택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장면 집, 서민들의 추억 가운데에서도 특히 행복한 순간이 오버랩 되어 떠오르는 자장면 집은 긴 역사만큼이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진한 추억을 간직하며 현재까지 그 명성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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