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라이센스’ 평택대학교 창학 100주년 - 평택대 창학 100주년,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1912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서울 서대문에서 창학
1981년 평택시 용이동에 새 둥지, 1991년 정규 대학교로 승격
1996년 평택대학교로 개명, 올 10월 15일 창학 100년 맞아

 
1912년 한국 최초의 초교파 성경학교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출발한 평택대학교가 오는 10월 15일
 
창학 100주년을 맞는다. 1979년 학교의 근거지를 서울에서 평택시 용이동 111번지로 이전하고 1991년 정규 4년제 대학인 피어선대학으로 승격, 이후 1996년 평택대학교로 개명하면서 꾸준히 발전의 길을 걸어온 100년의 발자취를 살펴봤다.


■ 창립기(1912~1950)

신학자요 목회자요 선교사인 아더 탭팬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 박사가 한국에 온 것은 1910년 12월 이었다. 일본을 거쳐서 한국을 방문한 피어선은 매주 선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주한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에 대하여 알게 된다. 한국 교회의 사도적 특성과 희생정신 그리고 성서 연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갈망을 보고 듣게 되었고 한국 땅에 성서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입국 당시부터 허약했던 피어선은 무리한 강의로 더욱 악화된 병세를 치료하기 위해 6주 만인 1911년 1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해 6월 3일, 74세를 일기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그가 세상을 뜨고 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1912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설립됨으로써 결실을 맺는다.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교를 임시교사로 사용해 개교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1915년 신문로에 교사를 건립해 본격적인 자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연희학원 설립자인 언더우드 박사가 1916년 2대 교장에 취임하는 등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한 피어선학원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기숙사는 1926년 제2의 6·10독립만세운동의 거점이었으며 1941년에는 신사참배 문제로 학원이 폐쇄되었고 태평양전쟁 중 학원 건물이 강제 징발되는 등 1945년 9월 재개원하기까지 한동안 흐름이 끊기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공산군의 점령으로 학원의 모든 문건이 소실되는 아픔도 맛봐야 했다.

■ 전환기(1951~1980)
한국전쟁으로 폐쇄된 피어선학원은 1954년 4월 다시 학원의 문을 열어 교육을 이어갔으며 195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최거덕 목사가 원장에 취임해 독립운영의 토대를 만들었다.
1960년대는 피어선학원이 인적·물적으로 뚜렷한 발전의 전환점을 만든 시기였다. 1961년 중학교과정인 피어선고등공민학교가 9개 학급 규모로 개교했으며 1967년에는 고등학교과정인 피어선실업전수학교가 문교부 인가를 받아 역시 9개 학급 규모로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고등공민학교와 실업전수학교는 1980년 설립인가가 폐지될 때 까지 피어선학원의 중요한 사회교육사업의 일익을 담당했다.
1969년에는 조기홍 현 총장이 재단이사회 사무국장에 취임했으며 1970년에는 고등공민학교와 실업전수학교 교장에 취임해 피어선학원의 중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1968년 피어선기념성서신학교로 개명한 후 신학과를 둬 졸업생이 장로회 신학대학에 입학할 자격을 얻음으로써 피어선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한국 기독교계에 진입하게 된다.
1968년부터 피어선성서신학교의 정규학교 승격을 준비하던 재단은 자금마련과 수익 확보를 위해 1971년에는 신문로에 연건평 2690평 125세대의 도심 맨션을 분양해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 이는 80년에 후반에 유행하기 시작한 빌라형 아파트와 같은 구조로 15년 이상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79년 대학설치 기준령에 합당한 곳을 찾아 평택시 용이동 111번지로 이전한 피어선신학교는 1980년 12월 29일 문교부로부터 4년제 대학 인정에 준하는 학교법인 피어선기념학원과 피어선성서신학교 설립을 인가받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 성장기(1981~1989)
1981년 2월 26일 조기홍 이사가 학교법인 피어선기념학원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3월 2일 신학과, 종교음악과, 사회복지학과를 설치하고 120명의 첫 입학생을 받으며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한 피어선성서신학교는 1984년 3월 피어선신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그 해 8월에는 문교부로부터 상급학교 입학 학력인정학교로 지정되기도 했다.
1985년 감격스런 제1회 졸업식을 치른 이후 1986년 지역사회개발학과 40명 신설 인가, 1988년 야간 사회복지학과 30명, 지역사회개발학과 30명 신설 인가 등 인적 규모의 확장과 더불어 1982년 본관 준공, 1985년 피어선 기념관 준공, 1989년 별관 준공 등 외적인 확장도 꾸준히 해가며 정규대학 승격 순서를 차근차근 밟아나간다.
대외적으로는 1983년 2월, 미국 인디아나크리스쳔대학, 1984년 7월 일본 동경 루터신학대학 등과 각각 자매결연을 맺어 국제화시대에 걸맞은 인제 육성의 토대를 다져왔다.
1984년에는 종교음악학과를 음악학과로 변경해 신학대학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반대학의 색채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 발전기(1990~1998)
1991년 마침내 4년제 정규대학으로 승격하고 학생수도 주간 경영학과 40명, 야간 국어국문학과 40명, 산업디자인학과 40명의 신설 인가를 얻어 명실상부한 4년제 대학교로 자리 잡은 피어선대학은 이듬해인 1992년 피어선대학교로 승격하는 겹경사를 맞는다.
1995년 제1회 학사학위수여식으로 정규 학사를 사회에 배출하기 시작한 피어선대학교는 1996년 피어선기념학원 설립자인 조기홍 이사장이 초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선다.
평택대학교로 개명해 지역사회와의 연개 강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경영대학원과 사회교육원이 설치돼 강좌를 연 것도 1996년부터다.
국제적으로는 중국 심양사범대학과 자매결연을 맺는 등 국제교류를 더욱 가속화했으며, 외적으로는 예술관 준공, 대학원관 기공이 있었으며 각종 연구소 통폐합과 재편성, 교수진 대폭 확대, 겸임교수제 도입, 정원 자율화대학 선정 등 많은 성과를 이룬 시기다.

■ 도약기(1999~현재)
평택대학교는 1999년 이후 대학의 내외형적인 변화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해왔다.
변변한 건물 하나 없이 세를 들어 시작한 교사는 2012년 10월 현재 128,832㎡(38,970평)의 대지에 건물 17개동을 보유하는 규모로 확대됐으며, 120명 3개 학과에서 출발해 총 4920명의 재학생과 24개 전공 및 학과와 일반대학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물류·정보대학원, 상담대학원 등 5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종합대학교로 발전했다.
지금까지 학사 12551명, 석·박사 1926명을 배출했으며, 10개국 33개 자매대학과 연구 및 교육 국제교류 관계를 맺고 교직원 및 학생을 교류하고 있다.
2011년에는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해당돼 한 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대학구조개혁위원회와 학자금대출제도 심의위원회의 자문·심의를 거쳐 교육과학기술부가 지정하는 이 제도는 대학경쟁력 강화라는 본래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특성과 지역별 할당이라는 무리한 시도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수도권 타 종합대학에 비해 적은 인원, 신학과 복지학 등 취업률 파악과 인정이 어려운 학과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점 등 불리한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만에 괄목상대할만한 성과를 거둬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서 벗어나 100년간 쌓아온 전통의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피어선 박사가 100년 전 꿈꾸었던 뜻과 정신을 계승한 평택대학교. 지나온 과거의 영욕을 뒤로 하고 또 다른 100년의 역사를 어떻게 개척해 나아갈 것인지 자못 기대가 커진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