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사람들의 105년 은행, ‘우리은행 평택지점’
국내 최초의 복합금융으로 문 열어 평택경제와 함께하다

 
올해로 105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은행 평택지점은 평택 금융역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은행 평택지점이 평택의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군(郡) 단위에 설립된 은행은 평택이 처음이었다. 전국에서도 우리은행 종로지점, 인천지점 다음으로 개점했을 만큼 평택은 지리적인 여건상 은행설립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정받았던 곳이었다.

1899년 창립한 대한천일은행이 전신
우리은행의 전신은 1899년에 창립한 대한천일은행이다. 1876년 일본이 강제로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후 1878년 부산에 첫 금융기관인 일본제일은행을 설립하자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 조선 상인들이 우리 자본에 의한 민족은행 설립을 추진해 ‘천일은행’이 탄생했다. 천일은행은 1899년 관료계급을 영입하고 황실자금을 끌어들이면서 ‘대한천일은행’으로 면모를 일신했으며 설립당시의 창립이념은 ‘화폐융통(貨幣融通)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으로 금융을 통해 우리나라를 일으키겠다는 뜻의 ‘홍익금융(弘益金融)’을 표방했다. 설립이후 대한천일은행은 민족은행으로서 민간은행뿐 아니라 화폐발행과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은행의 역할도 수행했다. 대한천일은행은 일제의 일방적인 경제조치에 맞서 상인, 민중과 함께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1905년 일시 휴업을 거친 뒤 재 개업하면서 ‘건실한 경영’을 하자는 일념으로 본점 신축과 창고업을 겸업하며 사세를 확장하는 등 한국 금융 태동기에 선도적인 역할로 시대적 사명을 완수해나갔다.
한일합병이 되자 금융계에도 엄청난 변화가 찾아와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변경되었고 1912년 은행법이 개정되면서 식민지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은행들이 창립되었다. 대한천일은행 역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조선상업은행으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유는 일제가 ‘대한’이나 ‘한국’이라는 단어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우리은행은 1912년 ‘한성공동창고’를 합병하면서 창고업을 겸업하는 등 견실한 성장을 지켜나갔다. 우리은행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부실 일본계 은행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때 경영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결국 국내 제일의 보통은행으로 우뚝 서는 저력을 보이며 광복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1950년 ‘한국상업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을 맞은 우리은행은 어려운 전환기를 무사히 넘기고 1960년대 초반 한국상업은행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 점포망 확장과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무기로 선두은행으로 부상했으며 1972년에는 국내은행으로는 최초로 민영화되었고 1974년 동경사무소 개설, 1980년대 초반에는 8개 국외 점포망을 가질 정도로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이철희·장영자 사건 등 연속해서 일어난 대형 금융사건으로 인해 시련을 겪기도 했으며 1997년 말 IMF를 겪으며 대형은행으로서는 처음으로 ‘한일은행’과의 합병을 선언해 ‘한빛은행’을 출범시켰다가 2002년 비로소 현재의 ‘우리은행’으로 은행명을 변경해 사용해오고 있다.

 
 

 
전국에서 3번째로 개점한 평택지점
1907년 8월 1일에 개점해 올해로 105년이 된 우리은행 평택지점은 종로와 인천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문을 연 지점이었다. 유동인구와 자본유통이 많은 종로, 그리고 인천항을 끼고 있어 무역이 활발했던 인천에 이어 평택이 군 단위로서는 처음으로 개점했다는 것은 그만큼 평택의 경제적 성장잠재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1905년 평택역에 경부선 기차가 운행되면서 근대로 접어든 평택의 경제는 평택항과 평야를 껴안은 평택역의 신설로 경기남부권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07년 고종황제의 특별지시에 의해 설립된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는 평택역 안에 창고건물을 두고 ‘한성공동창고 평택지점’을 설치하게 된다. 창고에 보관된 물품에 대한 담보대출과 증권발행을 통해 평택의 상업발전을 위해 화폐유통에 힘써왔던 평택지점은 창고와 은행업무가 하나로 이뤄지는 ‘국내 최초의 복합금융’이었다. 1912년 ‘조선상업은행’과 합병되면서 ‘조선상업은행 평택지점’이 되었고 은행의 창고업 겸업은 계속되어 물류의 중심지로 지역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1931년 조선상업은행은 경기도 진위군 평택리 185번지로 이전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경기도 진위군 평택리 175번지로 이전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은행 평택지점 자리인 경기도 평택군 평택읍 비전리 629번지로 이전한 것은 1954년 ‘한국상업은행 평택지점’으로 변경하던 당시였다. 1994년에는 평택시 안중면 안중리 산 47-51번지에 ‘한국상업은행 평택지점 안중출장소’를 개점하기에 이른다.
30년 전부터 우리은행에 근무해왔다는 우리은행 직원 김동열(66) 씨는 “당시는 평택에 은행이 별로 없었고 평택의 돈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은행을 거래했기 때문에 기업고객들까지 유치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며 “군 소재지로 은행이 최초로 생겼던 곳이 바로 평택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지금은 직원도 20명 정도지만 당시는 은행업무 전체가 수작업이어서 직원도 두 배 이상이 많은 45명 정도였고 돈 계산도 전부 주판으로 했기 때문에 숫자만 보며 바로 답이 나올 정도로 암산에 뛰어난 직원도 많았다”며 “현재는 번호표가 있어서 줄을 설 필요가 없지만 당시만 해도 명절이나 월급날이 되면 은행 밖까지 줄이 길게 늘어서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줄을 서느라 동동거리는 여자 고객들에게는 다른 사람이 대신 줄을 서서 자리를 맡아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쌍용차 주거래 평택지역경제 활성화
지난 2006년 100주년을 앞두고 그간의 역사를 모아 전시회를 갖기도 한 우리은행 평택지점은 각 지방에 있는 지점에서 우리나라 은행의 역사와 지방점포의 발자취, 그리고 ‘찾아가는 은행사박물관’의 일환으로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명품저금통을 전시하기도 했다. ‘한국경제의 동반자 107년 우리나라 우리은행’ ‘은행과 창고와의 만남, 최초의 크로스 셀 평택지점’ ‘꿈을 이루는 보물상자’ 등의 주제로 진행된 당시의 전시에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한성공동창고 평택지점 관련유물 7점을 포함한 은행 역사유물 34점과 세계명품저금통 60여점이 전시돼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큰 사고나 사건 없이 견실하게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끌어 온 우리은행 평택지점은 지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쌍용자동차를 주거래은행으로 2012년 현재 제26대 지점장으로 부임한 양충호 지점장을 필두로 현재까지도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평택 최초의 금융기관으로 근대도시 평택의 오랜 동반자였던 우리은행 평택지점, 한 세기를 보내는 지난 역사를 뒤로 하고 동북아 물류 중심도시인 평택과 호흡을 같이하며 또 다른 역사적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은행 평택지점은 지역경제 활성화의 중심축으로 우뚝 서 평택시민들과의 밝은 내일을 꿈꾸고 있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