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우선의 신협, 제 삶의 지향점”

어린 시절 웅변, 리더 자질 갖추는데 큰 힘
외유내강 삶, 앞으로 봉사하는 삶 살고파

 
우리나라 신협의 자산규모는 세계 신협 중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자본 마련을 위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신협이지만 그 중심은 조합원이며 평택신협도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협의 이념만큼이나 신협이라는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리더의 중심에도 사람을 중시하고 단체를 귀하게 여기는 사상이 빠질 수 없다.

자본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신협
“신협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아직도 꽤 많습니다. 신협은 소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본을 마련하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자에 대한 규정은 조합마다 다릅니다. 직장조합과 단체조합, 지역조합이 있어서 농협이나 신한은행 내에서도 조합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는 경우도 많고 미국의 경우에는 백악관 내에도 조합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기도 합니다”
평택신협 이근표(72) 이사장은 신협 이사장으로서 신협의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 1849년 독일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신협은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가브리엘라 수녀가 최초의 신협인 성가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고 같은 해 6월 서울에서 장대익 신부가 ‘협동경제연구회’를 중심으로 가톨릭 중앙신용협동조합을 발족하면서 시작되었다.
“신협은 잘살기 위한 경제운동, 사회를 밝힐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이 3대 실천운동입니다. 자본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협동조합 정신과 인간의 사회경제적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에 맞춰 설립된 조직이지요. 평택신협도 조합원들의 이익과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근표 이사장은 신협이 비록 금융권에 있지만 인간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도 역사와 인문학을 좋아하지만 수학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며 크게 웃는다. 그런 그가 신협의 이사장을 맡게 된 건 항상 조직을 중요시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며 살아온 그의 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젊은 시절
“6살때 옆 동네 훈장님께 천자문을 배웠습니다. 낭독하며 배우는 천자문 덕분에 무언가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이 제 몸에 배었었는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책을 잘 읽는다고 선생님께 항상 칭찬받곤 했지요. 아마 그때부터 제겐 자신감이라는 것이 항상 따라다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중중학교 다니던 시절엔 혼자 웅변도 익혀서 상을 받곤 했지요. 제가 어렸을 때는 안중 덕우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데 그 바닷가에 서서 혼자 큰 소리로 웅변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이근표 이사장은 자신의 성향은 그런 웅변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또한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하던 4-H 활동을 통해 함께 토론하고 실천하며 산교육을 경험했었던 일도 자신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의 자신감은 학창시절 내내 이어져 혼자 수원으로 유학 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어김없이 발휘되곤 했다고.
“수원에서 사립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촌에서 올라온 학생이라 주눅이 들었을 법도 하건만 전 주눅한번 안 들고 오히려 친구들보다 앞장서서 어떤 일이든 이끌어나가곤 했습니다. 그런 성향들이 남았었는지 과외선생도 해보고 고향에 내려와 농사도 지어봤지만 한동안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이근표 이사장은 8남매 중 장남으로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인천교대에 진학해 교사를 하기도 했지만 그 직업은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고 말한다. 26세의 나이에 이미 4-H 연합 회장을 맡기도 했던 젊은 시절의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건 당시 여느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민주주의로 세상을 조금 더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으며 그런 꿈은 정치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전부 펼치진 못했지만 당시만 해도 의료보험이 불모지였던 평택에서 초대 의료보험조합장을 역임하며 의료보험을 확산시켰고 제2대 평택시의회 의원을 지내며 평택발전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봉사하는 삶 살터
“시의원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제가 발의해서 평택호라는 이름을 되찾았다는 겁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평택호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아산만·아산호라는 이름이 통용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또, 시민들을 위한 공원조성도 참 중요하게 생각했었지요. 당시에도 사람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늘 있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거든요. 당시의 노력으로 조성된 것이 바로 요즘 시민들이 많이 찾는 덕동산 공원이죠”
이근표 이사장은 1978년 신협 창립멤버였다가 시의원을 마친 다음해인 1996년에 신협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오는 내내 평택 토박이로 많은 단체들을 이끌며 변화를 꿈꾸었던 만큼 지금도 여전히 평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평택호에서 진위천 쪽으로 올라가는 곳에도 시민들이 쉴 수 있는 녹지공간을 좀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평택시의 한 가운데 정도에 공원을 조성해 북부, 서부, 남부 사람들이 쉽게 찾아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평생을 봉사하며 활동하느라 아내에게 경제적이나 마음 적으로 많은 빚을 졌다는 이근표 이사장은 앞으로도 노인복지에 관한 일들을 해보고 싶다는 언질을 내비친다.
아내와 함께 저녁나절 산책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이근표 이사장, 부드럽고 편안한 겉모습 이면에 강한 리더로서의 자질을 갖고 삶을 살아온 그는 앞으로도 봉사하는 삶을 놓지 않겠다고 말하며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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