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을 바꾼 철도역 107년, ‘평택역·서정리역’
서민 애환 담긴 역사 驛舍 사통팔달의 중심으로 자리 잡다

▲ 평택역(1960년대)
▲ 서정리역(1970년대)
▲ 평택역과 AK플라자 민자역사(2009년)
우리나라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서울 노량진~인천간 경인선에 열차가 최초로 운행된 이래 이 땅에 신문명을 전파하는 도구이자 일제의 침략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 6·25 전쟁 중에는 수송전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경제개발이 한참 이뤄질 시기에는 산업의 역군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1899년 신문명 전파한 한국철도
우리나라에서 공식 철도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초의 기구는 1894년 7월 내각휘하 공무아문 철도국이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고 1910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철도국은 조선철도관리국, 조선총독부 철도국,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경성철도국이라는 이름을 거쳐 다시 한 번 조선총독부 철도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1943년 철도국을 교통국으로 개편하는 등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명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899년 최초의 전기철도가 개통되면서 우리나라 대중교통에도 새로운 혁명을 가져왔다. 광복이전에는 탱크형 증기기관차, 사설철도, 전기기관차 등이 운행됐으며 광복이후인 1945년에는 우리 기술로 만든 기관차인 ‘해방 제1호’가 영등포~수원 구간을 운행하기도 했으나 이후 1967년 디젤전기기관차의 출현으로 증기기관차의 본선운전이 중지되기도 했다.
1972년에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제작된 전기기관차가 첫 시운전을 했으나 1977년에는 국내 최초로 대우중공업이 제작한 국산 전동차를 운행, 1979년에는 현대차량중공업에서 제작한 국산 최초의 디젤 전기기관차가 운행되는 등 국내 철도차량 제작회사가 발족되면서부터 고속 및 고급 객차에 대해 국내 개발이 추진되었다.
1945년 광복 이전까지 2027량이었던 객차는 1948년 남북 분단으로 인해 1300량까지 줄어들었으며 1953년 말에는 6·25전쟁으로 인해 600량이 파괴돼 철도당국은 부족한 객차를 확보하기 위해 화물을 수송하는 유개화차(有蓋貨車)에 목판의자를 설비해 여객용으로 개조한 이른바 대용객차(代用客車)를 운용하기도 했다.

▲ 평택역 만세시위 주도자 판결문

1905년 설립된 교통중심 평택역
경부선 철도는 원래 사람들의 유동인구가 많고 장시가 활발했던 안성을 거쳐 갈 예정이었으나 철로가 지나가면 지역이 낙후될 것이라는 안성주민들의 반대로 인해 평택 쪽으로 밀려 지금의 철도 노선과 평택역이 생겨나게 됐다.
평택은 철도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서 ‘예전에 이름 없던 땅이 갑자기 경제상의 요지’로 변해 경기도 남부지역의 유통 중심지로 떠올랐다. 1905년 개통해 영업을 개시하게 된 평택역은 일제 때의 병남면 평택리로 철도역 설치 당시 마을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은 전답지(田沓地)였다. 철도 역사(驛舍) 주변은 물론 군청 청사가 들어선 곳도 대부분 전답이었고, 변두리에 민가(民家) 몇 호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 지역은 경부철도선 부설과 동시에 일본인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1904년에 간행된 <최신한국실업지침>에서는 일본인이 이주해서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해 볼 만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평택역은 경부철도의 역 중에서 서해안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철도역으로 평택시가지가 평택역 서쪽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점은 평택이 단지 철도수송에 의존하는 남북간 종관의 중간 상품유통지로서 뿐만 아니라 서해안의 수운에 기초한 전통적인 유통망의 기능도 동시에 갖고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소비시장을 배후지로 하는 대시장이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동서를 잇는 도로망과 남북을 잇는 철도망의 편리한 이점을 안고 평택은 경기남부지역에 상품을 공급하는 중계상업지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 평택역에 도착한 젖소(1969년)
상품유통에서 차지하는 평택의 기능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평택평야에서 산출되는 미곡이 집산되고 이출되는 통로로서 기능했지만, 적어도 1910년 이전에는 여전히 지역 내의 상품유통을 매개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지위는 1905년 평택역의 설치 이후 세워진 한성공동창고 평택출장소의 활동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1907년에는 고종황제의 특별지시에 의해 설립된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도 평택역 안에 창고건물을 두고 현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성공동창고 평택지점’을 설치해 평택의 교통과 경제 집약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이행했다.
평택역은 107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만큼 지역의 다양한 사건사고도 간직하고 있다. 1919년 3월 11일 평택역 앞 사거리에서는 비전리에서 미곡상을 하던 이도상(李道相)의 주도아래 수천 명이 만세를 부르는 3·1만세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1950년에는 6·25전쟁 중 미군의 오인폭격으로 인해 평택역이 폐허로 변하기도 했는데 이 오폭폭격으로 인해 군인과 피란민 등 1백여 명이 숨져 일대를 피로 물들이기도 했다. <평택군지(郡誌)>와 김병길(당시 74.평택시 원평동)씨 등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 7월 4일 정오께 평택시 평택동 옛 평택역 상공에 유엔군 전투기로 보이는 항공기가 나타나 평택역과 당시 성동국민학교에 오인으로 인한 기총사격과 폭격을 했다고 한다.
또 육군본부 직속 독립대대 화기중대 소대장 정규화 씨의 <노병들의 증언>이라는 책에 의하면 당시 상황에 대해 ‘평택역 근방에는 동원된 많은 제대군인이 화차에 실려와 있었으며 전방에서 후퇴하는 병력까지 합쳐 역 구내와 광장은 크게 붐비고 있었다. 이때 쌕쌔기가 날아와 기총 공격을 하여 평택역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7년 6월 13일에는 위험에 처한 승객을 구하고 대신 목숨을 잃은 역무원 이근호(李根浩) 씨에게 정부 녹조근정훈장이 수여되기도 했으며 특히 역과 인접해 발달한 일명 ‘삼리’ 집창촌은 규모가 매우 커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1977년 11월 3일에는 평택~서정리 통복건널목에서 버스가 건널목을 횡단하던 중 기관이 정지되어 정차하면서 8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벌어졌으며 1993년 11월 9일 서정리~평택 장당건널목에서는 승용차가 경보장치 동작 중 일단정지를 무시하고 건너가다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기도 하는 등 철도 건널목과 관련된 일련의 두 사건은 지금도 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 평택역(6·25 전쟁시 오폭피해)

전국 1일 생활권으로 삶의 질 향상
현재의 민자역사 이전 마지막 공공역사는 1987년에 신축 준공했으며 2004년에는 새마을호 정차가 개시되었고 2009년에는 민자역사로 지어져 2층은 평택역사, 나머지는 AK플라자가 영업 중이다. 평택역과 서정리역은 1905년 동시에 설립됐으며 송탄역은 K-6 미군기지 건설 당시인 1952년 경부선 복선공사로 인해 설립됐고 병점~천안간 전철 개통에 따라 2005년 1월 20일 평택, 서정리, 송탄역에 전철역이 개통돼 운행되기 시작했다. 또 하북역과 지제역은 병점~천안간 전철역 추가 개통으로 2006년 6월 30일 신설됐다.
평택역은 2009년 9월 본부체제 개편에 따른 관리역으로 조직 개편해 경부선 병점역부터 평택역간 28.5km 10개역을 관할하고 있다. 그중 병점, 서동탄, 오산, 송탄, 서정리 등의 보통역 5개는 업무를 직접 관장하고 있으며 세마, 오산대, 진위, 지제역은 업무 분담역으로 코레일네트웍스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평택역은 오는 2014년 12월 지제동에 KTX 신평택역 준공을 앞두고 있어 이 역이 준공되게 되면 평택도 전국을 1시간 30분대에 연결하는 반나절 생활권에 접어들 전망이다.
서민들의 애환과 미래의 희망이 깃든 평택역, 평택교통의 최첨단에서 평택의 미래와 함께 발전하게 될 평택역은 평택시민들과 더불어 107년에 걸친 교통의 역사를 함께 공유해왔으며 향후에도 평택의 도시경쟁력을 향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 통복건널목 버스 충돌(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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