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평택교육의 역사 ‘진위향교·평택향교’
전통을 이어가며 살아있는 교육의 산실로 자리하다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호 평택향교(팽성읍 객사리)
우리나라 교육기관의 효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설치한 태학이다. 고려말기 유학을 가르쳤던 최고의 중앙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으며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던 지방교육기관은 향교였다. 조선시대 들어 향교는 한 고을에 하나씩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평택현(平澤縣)의 관할이 충청도와 경기도를 오가다가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진위군에 병합돼 평택에는 현재처럼 평택향교와 진위향교 등 2개의 향교가 남아있게 됐다.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진위향교(진위면 봉남리)
풍수지리 뛰어난 진위향교
진위향교는 태조 7년인 1398년에 세워진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공자신위를 모신 대성전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돼 있다. 진위향교는 1593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져 1597년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으로 건물이 다시 불타 없어졌다가 이듬해인 1637년에 다시 세워지면서부터는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고 제사를 비롯해 지역유림들의 여론을 모으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향교는 대부분 고을에서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진위향교는 특히 풍수지리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무봉산 연봉 남쪽에 있는 부산(釜山) 기슭을 따라 자리하고 부산고성에 둘러싸여 있는 진위향교는 산줄기가 좌우로 팔을 벌린 형상의 오목한 산기슭 경사면에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으로 남쪽을 향해 건립돼 있다.
전체적인 형국에서 산세가 약한 편이므로 그 허함을 보완하기 위해 남쪽에 조산(造山)을 쌓기도 했으며 향교 앞을 흐르는 장호천, 현재의 진위천은 용인계와 수원계에서 흘러드는 것으로 동쪽과 서쪽은 장안평이라는 충적지가 발달했고 남쪽은 퇴봉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는 문필봉이 있다. 이 같은 지세를 놓고 볼 때 진위향교는 무봉산 남쪽 줄기 부산이 자리 잡고 동서로는 진위천의 충적지인 장안평을 바라보고 있어 풍수의 기본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명당이라 할 수 있다. 또 명륜당과 서재도 풍수지리상 용진처(龍盡處)라 불리는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향교 담장 옆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은 진응수라 해서 매우 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이유로 진위향교는 전국 향교중 으뜸인 풍수지리로 유명하다.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등 네 동의 건물과 내삼문, 외삼문, 홍살문으로 구성된 진위향교는 학교가 앞에 있고 사당이 뒤에 있는 모양의 전학후묘(前廟後學) 형태를 하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공자 위패를 중심으로 중앙에 증자, 안자, 맹자, 자사 등 4성위(聖位)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좌우에는 송조 2현, 우리나라 18현으로 불리는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진위현에서는 지방관이 부임해 선정(善政)을 베풀다 떠나면 백성들이 봉남리 입구 큰길가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 공적을 기렸는데 그래서 생겨난 지명이 ‘비석거리’였고 이것이 변하여 ‘비선거리’라 불리기도 한다. 현재 진위향교에는 경기도의 향약과 관련한 중요 자료인 ‘모성계규약’ 등 고서와 진위객사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패·궐패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사료들이 보관돼 있어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 평택현감 이승훈 초상화
이승훈의 ‘성묘불배’ 평택향교
경기도 문화재자료 4호로 지정된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평택향교는 진위향교와 같은 1398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택향교는 임진왜란 때 고을 전체가 불타면서 사라졌다가 전란 후 복구했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공자신위를 모신 대성전만 건축하고 명륜당은 19세기 말에 새로 건축했다. 건축양식은 소박하고 단아한 조선후기의 건축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건물의 배치는 진위향교와 마찬가지인 전학후묘(前廟後學) 형태로 공부할 수 있는 강학공간이 앞에, 제향공간이 뒤에 배치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평택향교는 지방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 외에도 한국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이자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평택현감 이승훈의 ‘성묘불배사건’을 빠뜨릴 수 없다. 정약용의 누이를 아내로 맞았던 이승훈은 1791년 6월 24일에 평택현감으로 임명돼 4개월이라는 짧은 재직기간을 마쳤다. 당시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버리는 파문을 일으킨 데다 승정원에서 1785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가톨릭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가지다 검거되는 을사추조적발 사건을 재론하고 이승훈을 구서사(購書事), 간책사(刊冊事) 등에 관련된 죄목으로 거론해 평택현감에서 물러나게 했다. 더구나 평택현감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792년에는 평택의 유생이었던 조상본과 권위, 정언택 등이 이승훈의 평택현감 재직 시 향교의 문묘에 절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문제 삼아 조정에 상소를 올리는 등 성토하고 나섰다. 한 고을에 수령이 부임하면 3일 내에 성묘에 분향 배례하는 것이 관례요 불문율이었지만 이승훈은 보름이 지나도록 배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주교가 규탄의 대상이 되었던 당시, 고을 수령이 관례를 어기고 공자사당에 배례하지 않는 행위는 죽음을 면치 못할 큰 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생들이 여럿이 돌려가며 보는 통지문을 돌리고 상소까지 하자 조정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1792년 2월 안핵어사를 평택에 파견해 진상을 조사케 했다. 그런데 안핵어사로 파견된 김희채는 이승훈의 친척으로 이승훈을 두둔하기 위해 이승훈이 배례하지 않았음에도 배례했다고 조정에 허위보고를 하고 문제를 제기한 평택 유생들을 관장 무고죄로 몰아 엄형에 처했다. 이승훈은 이후 천주교와 관련된 여러 사건에 연루돼 회개와 배교를 거듭하다가 신유교난에 연루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평택 교육의 뿌리 ‘향교’
향교의 입학정원은 고을의 격에 따라 90~30명으로 차이를 두었는데 진위향교와 평택향교는 현(縣)에 속해 있어 15~16세 이상이 된 학생들 30명이 입학할 수 있었다. 교수관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볼 때 향시(鄕試)에 합격한 인물이나 지역에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사람을 관찰사가 선발해 임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향교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석전대제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인 석전대제는 매년 봄과 가을로 나누어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즉, 초순 10갑자의 ‘丁’자가 들어가는 날에 성균관을 위시한 전국 234개 향교에서 일제히 드리고 있다. 이는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하는 유교제사이므로 문화적 가치가 높아 중요무형문화제 제85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진위향교에 보관된 석전참사록(釋奠參祀錄)에는 일제강점기에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정기적으로 석전제를 드렸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참화(慘禍)를 겪으면서 참여하는 인원이 줄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어 8월에 한 번만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오며 평택향교의 경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향교에 주둔하면서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비록 조선 중기 이후 향교가 교육의 기능을 상실해 서원에게 역할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향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 제향은 현재까지도 계승되어 진위향교와 평택향교를 통해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평택 교육기관의 뿌리로서 현재까지도 그 위상을 자랑하고 있는 진위향교와 평택향교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는 물론 평택 교육의 현존하는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평택향교 건립 중수기
▲ 진위향교 소장 고문서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