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처럼 봄밤을 비추던 하얀 목련이 어느새 거리에 떨어져 뒹구는 잔인한 4월입니다. 어제는 지인의 부음 소식에 장례식장엘 다녀오고 오늘은 또 다른 지인의 득남 소식에 신생아실을 들렀습니다. 이별의 아픔을 승화시키기도 전에 만난 작은 생명의 탄생은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죽음들이 건조한 음성에 실려 들려오고 정치인들은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을 쏟아냅니다. 예술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고, 정치인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사용한다더니 그 말의 의미를 뉴스를 보며 알게 됩니다. 이른 새벽 뉴스로 시작한 하루는 다양한 사건사고에 울고 웃고 분노하면서 또 그렇게 저물어 갑니다.

벚꽃이 날리고 봄기운이 따뜻해 질 때면 언제나 생각나는 책이 있습니다. 봄볕을 맞으며 마당 한 구석에서 그루밍 하는 고양이, 그 고양이가 바라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나쓰메소세키의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입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나쓰메소세키의 등단작으로 알려진 이 소설에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모습이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돼 있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 회자되고 있습니다.

주변머리라고는 없는 고집불통 중학교 영어선생을 주인으로 둔 오만방자한 고양이, 그 고양이의 눈에 비춰진 인간은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피곤하게 사는 족속’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 연연하고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서 투덜대기만 하는 게 인간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딱히 반박할 답변도 없어집니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세상 이치를 알게 된다. 세상 이치를 알게 된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나날이 위험이 많아져 방심할 수 없게 된다. 교활해지는 것도 비열해 지는 것도, 표리 두 겹으로 된 호신용 옷을 걸치는 것도 모두 세상 이치를 아는 결과이며 세상 이치를 안다는 것은 결국 나이를 먹는 죗값이다. 노인 중에 변변한 자가 없다는 것도 같은 이치다”

“주인은 뭐든 잘 모르는 것을 존중하는 버릇이 있다. 잘 모르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잠복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것에는 어쩐지 고상한 마음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속인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벌리지만, 학자는 아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설명한다. 대학가에서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아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인망이 없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무사태평해 보이는 이들도 마음 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책의 압권은 풍자와 해학이지만 고양이의 말에서 연민과 비애가 느껴지는 것은 오늘도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닐지, 봄밤이 깊어가는 시간 잠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고양이를 보다 문득 생각에 잠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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