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어 중에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코이’는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 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cm 까지 자랍니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같은 물고기인데도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가 되고, 강물에 놓아기르면 대어가 되는 신기한 물고기지요. 이처럼 환경에 따라 변하게 되는 것을 ‘코이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도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100%의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환경에 따라 어떤 사람은 10%를 발휘한 채 생을 마감하고, 또 어떤 사람은 90% 이상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능력을 모르다가 환경이 바뀐 뒤에야 뒤늦게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환경적 요인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 가운데 바로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입니다. 스승은 학교에서 만날 수도 있고 사회에서 만날 수도 있지만, 잠재된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스승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어른이 된 뒤에야 만나게 된 네 분의 스승이 계십니다. 한분은 30대 초반에 동화를 배우며 만난 강정규 선생님, 30대 후반에 시를 배우며 만난 장석주 선생님, 대학원에 진학해 만난 원로 시인 김명인 교수님, 그리고 마지막 한분은 평론을 배우며 만난 나와 나이차가 크지 않지만 언제나 행동으로 가르침을 주시는 이혜원 교수님입니다.

첫 번째 스승님이 일러주신 것은 글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할 순수와 자연을 바라보는 통찰의 힘이었고, 두 번째 스승님이 가르쳐준 것은 세상과 시의 관계맺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스승님은 욕심 없이 살아가는 시인의 삶을 몸소 보여주셨고, 네 번째 스승님은 학자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천생 글쟁이로 살아가야 하는 나는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자신을 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어 좁은 개울을 거슬러 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글쟁이로 살아가는 동안 내 생각의 깊이가 조금 깊어질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아마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무리 교권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서는 학생들을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스승이 더 많습니다. 누군가를 훌륭한 사람으로 가르치겠다는 그 꿈을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기형적인 사회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사회가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런 희망의 몸집을 키우는 스승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있는 한 우리의 아이들은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요. 만일 주위에서 그런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 역시도 그동안 발휘하지 못했던 능력을 펼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내 스승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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