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경제와 함께한 산증인 ‘평택의 전통시장’
애환과 눈물이 깃든 5일장에 사람의 情이 깃들다

▲ 평택장(1910년대)
▲ 안중우시장(1972년)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서민경제를 이어가던 전통시장에는 서민들의 애환과 눈물, 그리고 역사가 깃들어 있다. 집집마다 소박하게 들고 나온 물건들을 팔던 전통시장은 점차 5일장의 규모로 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타 지역의 장돌뱅이들이 와서 장사를 하는 등 활기를 찾아갔다. 현재는 거의 사라진 풍경이 되었지만 상설시장이 열리기 전 각 마을마다 열리던 5일장은 단순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역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누던 공동체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평택시에는 현재 통복시장, 서정리시장, 안중시장, 송북시장, 중앙시장 등의 상설시장이 열리고 있으며 유일하게 안정리 시장만은 지금도 5일장이 열려 그나마 사라져가는 옛 풍미를 느끼게 하며 비전동 재랭이고개 등 지역 곳곳에서도 작지만 5일마다 장이 열리고 있다.

정(情)이 그리워 찾던 ‘시골장’
평택은 5일장이 되면 동네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장돌뱅이들로 인해 일시에 분주해졌다. 지역특산물인 과일과 야채, 콩·쌀·참깨·들깨 등의 농산물, 그리고 가정에서 꼭 필요한 실, 잿물, 참빗, 물감 등 생활필수품 들이 바닥에 수북히 놓여있어 5일장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상인들과 흥정하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두서너 개의 ‘덤’ 쯤은 필수적으로 담아가게 마련이었고 상인들 역시 그러려니 하며 인심 쓰듯 흔쾌히 담아주던 풍경은 재래시장에서나 맛볼 수 있는 따뜻한 풍경이었다. 파는 사람의 ‘덤’에 보답이라도 하듯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집에서 가꾼 과일이나 채소 등을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전통시장은 정해진 가격이 아닌 원하는 만큼의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어 때론 500원 어치가 1000원어치 분량의 물건이 되기도 하고 ‘깎아 달라’는 애교 섞인 흥정이 수시로 통용되던 곳이었다.
파장 무렵의 ‘떨이’ 역시 장날 재미에는 빠질 수 없는 것으로 시장에 저녁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 장돌뱅이들은 저마다 마음이 조급해져 ‘떨이’를 외치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불러 모았고 이때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낮 시간보다 싸고 많은 물건을 가져갈 수 있었다.

역사를 간직한 평택의 ‘5일장’
5일장에는 각 지역마다 날짜를 기억하고 모여드는 장돌뱅이들로 북적였다. 평택장은 5일과 10일, 서정리장은 2일과 7일, 안중장은 1일과 6일, 송북장은 4일과 9일, 안정리장은 3일과 8일에 각각 열렸다. 1770년대에는 평택북부지역에서는 ‘읍내장’이 2일과 7일, ‘구거리장’이 4일과 9일에 열렸으며 남부지역에서는 ‘소사장’이 5일과 10일에 열렸고 서부지역에서는 ‘오타장’이 1일과 6일, ‘읍내장’이 3일과 8일, ‘안중장’이 1일과 6일, 그리고 4일과 9일에 열렸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5일마다 열리는 장터에는 저마다 자리가 정해져 있어 장돌뱅이들은 대부분 자릿세를 내고 장사를 했는데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었지만 자릿세를 안내면 쫓겨나기도 하고 장사꾼들끼리는 서로 자리를 팔고 사기도 했다. 당시에는 쌀 90kg이 한가마니로 한 말은 9kg이었는데 대부분의 농민들은 10kg쯤을 가져와 쌀집에 팔곤 했기 때문에 쌀집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농민들에게서 쌀을 살 때 남는 이익과 되를 재서 팔 때의 이익, 저울 눈금을 재서 팔 때의 이익, 약간의 눈속임 이익으로 다른 상인들에 비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생선 장사들은 가까이 포승과 현덕에 포구가 있긴 했으나 잡히는 생선들의 종류가 풍족하지 않아 열차를 타고 수원까지 나가 물건을 떼 오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에는 군문교가 끊어지고 기차역이 불에 탄 뒤 시내 쪽에도 폭격이 가해져 원평동 쪽의 평택장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래도 장사꾼들은 장날이면 현재의 통복 지하도 근처에 쭉 늘어앉아 장사를 하곤 했는데 그 뒤 장사꾼들이 늘어나고 ‘땡땡거리’라 불리던 시장로터리와 진청학교(현 대한공업사 부근) 근처에까지 시장이 커짐에 따라 1951년 가을, 평택군청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에게 구획을 나눠 분양해 지금의 통복시장을 만들었다. 시장 가운데 위치했던 싸전은 그래도 꽤 큰 규모를 가진 편이어서 서울에서 도매상들이 차를 몇 대씩 대놓고 쌀을 실어가기도 했다. 또한 현재의 평택초등학교 자리에는 우시장이 있어 소들을 팔고 사기도 했으며 현재의 통복천 근처 개전이라 불리던 곳에서는 가축시장이 열려 개를 비롯한 각종 가축들이 매매되었다.
안중시장도 평택지역에서는 꽤 큰 시장으로 알려져 장돌뱅이들 사이에 “안중 장날 비가 오면 장돌뱅이 울고간다”는 말이 오가곤 했다. 현 경기물류고등학교(옛 안일여고) 위쪽으로는 5일장이 열렸으며 현재의 경기도외국어연수원 부근에서는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서정리장은 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힘들만큼 골목을 중심으로 장이 드문드문 형성돼 있었는데 장꾼들이 거의 없어 오전 장을 보고 나면 거의 다 끝이 날 정도였다. 송북장 역시 아침 9시가 되면 장이 다 끝난다 해서 ‘아침장’이라 불렀으나 중앙시장은 송북장에서 물건을 떼다가 저녁때까지 장사를 했다 해서 ‘저녁장’이라 불렀다. 특히 중앙시장과 팽성의 안정리장에는 미군부대 물건들이 많이 나와 화장품이나 양주, 의료, 식료품 등 미제 물건을 구입하려던 사람들은 일부러 그날을 기다려 물건들을 구입해갔다.
평택에는 5일장 외에도 ‘난장’이라 불리던 가설시장이 열리곤 했는데 난장은 보통 특산물이 집중적으로 공급되고 수요되는 지방에서 열렸으며 하루씩 열리는 정기시에 비해 며칠씩 계속되거나 명절에 열리기도 했다. 평택은 주로 명절날 난장이 열렸는데 파일난장이나 백중난장이 그것으로 난장이 열릴 때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전문 연희패를 불러 난장굿을 놀게 했으며 평택에서는 세벌 김매기가 끝나는 백중에 난장굿이 열렸다.

서민경제를 주도하던 전통시장
철도부설 이전 평택지역 경제의 중심은 군문포였다. 이곳은 평택평야에서 생산된 곡물이 이출(移出)되던 곳이어서 쌀·보리·콩 등 평택평야의 농산물과 수입상품은 주로 군문포를 통해 유통되었다. 군문포는 안성과 아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3대 장시로 유명했던 안성에 서해안의 해산물을 공급하는 입구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평택의 장시가 발전했고 1905년 철도역이 설치되면서 평택은 경기도 남부지역의 유통 중심지로 성장해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시장의 경제활동은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민족 착취형태로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도 5일장의 풍토와 보부상, 행상 등의 활동은 지속되었다고 전해진다. 철도의 확장과 신설에 따라 1938년에는 진위군청이 평택으로 이전해 평택군청으로 개칭되면서 군의 중심이었던 진위면 봉남리 일대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진위군청 소재지 부근에 5일장이 섰고, 비록 규모는 작으나 송탄동 장안부락과 신장동 구장터마을 등지에도 시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시장도 평택군청이 소재했던 원평동 주변과 서정리역 주변으로 옮겨갔다. 특히 소사장이 평택역 주변으로 옮겨져 기존의 평택장과 합해지면서 평택역 부근에 새로운 평택장이 신설돼 오늘의 통복 상설시장의 토대를 만들었다.
사회적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치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예전 활발했던 장시의 기능은 점차 쇠퇴기를 걷고 있다. 평택시에서도 이러한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취지아래 발 벗고 나서고 있으나 사회적인 변화에 발맞춰 보다 근본적인 유통이나 환경, 서비스 등이 개선되어야 하는 과제들을 안고 있어 예전과 같은 활성화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서민들의 유일한 생활필수품 교역의 장소이자 친지 등을 만날 수 있었던 만남의 장소, 그리고 사교를 통해 새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5일장, 사람의 정이 그리울 때마다 따뜻한 인정과 ‘덤’, 푸근한 미소와 함께 떠오르는 시골장의 모습은 우리가 지켜야할 고향의 모습이다.
 

▲ 1770년 평택지역 시장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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