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은 이념보다 잘 사는 것이 우선”

대학 졸업 후 농촌에 내려와 뿌리내려
김준 선생·고건 국무총리와 인연 맺어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노래로 한때 전국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던 새마을운동은 어떤 정치적 이념에서 벗어나 각 마을을 단합하게 만들고 잘 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재조명되고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뜻을 지닌 새마을운동은 1970년 ‘새마을가꾸기운동’으로 제창돼 2011년에는 새마을의 날이 제정되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도 다양한 사회적 운동을 이어가며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학사농군, 농촌개량에 앞장
“평택시 현덕면에서는 12대가 살았어요. 전 초등학교 5학년 때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를 했는데 당시에는 평택에도 중학교도 없었을 때였지요. 1957년에 건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군대 갔다 와서 바로 시골로 내려와 야학을 하며 농사개량 사업을 시작했어요”
새마을중앙회 초대회장을 지낸 황대영(80) 어르신은 당시를 회고하며 말을 잇는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이라면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시골이었던 안중에서 엘리트인 대학생이 농사꾼으로 변신했다는 사실은 큰 화젯거리이기도 했다.
“제가 먼저 농사에 관한 책을 구해보며 농민들에게 개량농법을 알려주기도 했어요. 덕분에 수확량이 많아졌지요. 게다가 1960년대부터 퇴비증산과 객토사업, 도로개량까지 나서서 하다 보니 그 소문이 면과 군에까지 나서 학사농군이라고 신문에도 나고 그랬어요. 군수가 찾아와 농사짓는 법을 설명하라고 하기도 하고 제가 농사짓는 방법이 군수 방에 걸려있을 정도였지요”
황대영 어르신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학사농군으로 마을개량에 앞장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에게 농사는 어떤 것보다도 자신이 나서서 계몽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뿌리는 대로 거두는 진솔한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농사법이 효과를 거두면서 주변의 이목을 끌었던 반면 농촌에서 어렵게 대학 학자금을 대주며 공부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런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농사란 초등학교를 졸업 못한 사람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상 2회 수상한 ‘촌사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난 뒤 정부가 국비를 지원해 일본으로 6개월 간 40여명의 농업연수생을 파견하는데 제가 선정이 돼서 일본의 선진농법을 배워오기도 했어요. 돌아와서 사례발표도 하며 자연스럽게 새마을지도자가 되었지요. 새마을정신을 알기 위해 도와 중앙연수원도 신청했는데 거기서는 학생대표격인 학생장을 맡기도 했구요. 당시 우리 마을에는 대통령 하사금도 전달됐는데 새마을운동 덕분에 우리 마을이 여러모로 혜택을 많이 입었지요”
황대영 어르신은 1978년과 1979년 증산왕으로 대통령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기도 했다. 황대영 어르신의 이야기는 정부에서 만화로 만들어 배포하기도 할 만큼 유명세를 탔다. 당시 연수원장이자 새마을운동의 1인자라 불리던 김준 선생과도 인연을 맺었으며 고건 전 국무총리와는 농민대표로 헌법심의위원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기도 했다.
“당시 헌법심의위원회에서 저는 새마을정신을 지켜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처음부터 잘 살아보자는 취지로 마을을 조직화했고 마을사람들의 협동으로 많은 것을 이뤄냈다는 사실이 어떤 정치적 이념보다 큰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촌사람이라 유신이며, 정치며, 법이며 그런 건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새마을운동이 있어서 농촌도 살만해졌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정신만큼은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농촌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황대영 어르신은 새마을지도자협의회 2대 회장과 새마을운동중앙본부(현 새마을운동중앙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의 ‘NEW’ 바람
“돌아보니 참 많은 일들을 하며 살아왔지만 아이들에게는 제가 걸어왔던 삶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다들 장성해서 제자리를 지키며 살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지요. 아이들에게 중요하게 강조하는 건 조상을 모시는 일이에요. 시제가 되면 손자들까지 다 참석하게 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을 모시게 하지요”
실속 없는 사회사업에 뛰어다니던 자신 때문에 농사지으랴, 끝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접대하랴 고생이 많았던 아내에게 가장 고맙다고 말하는 황대영 어르신은 일흔을 넘기면서부터 각종 사회적인 일에서 물러나 아내와 조용히 노후의 삶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큼은 아직도 꼿꼿해서 남아있어 새마을운동의 미래에 대한 제언도 빠뜨리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뉴새마을운동’ 바람이 불고 있다고 들었어요. 현재는 우리나라 농촌도 잘 살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새마을운동은 그리 필요하지 않게 됐지만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살아있다면 범죄 줄이기 운동이나 어린이 성폭행근절운동 등 사회의 정신적인 부분에는 지금도 새마을운동이 충분히 참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에는 무엇이든 변화를 이끌 수 있던 것이 좋았었다고 얘기하는 황대영 어르신, 이제 부부가 함께 마당의 꽃들도 가꾸고 자식들에게 줄 김장도 손수 담그는 등 하루하루 안정된 노후를 보내는 어르신의 모습이 충만하고 평온해 보이는 것은 새마을운동이라는 시대적인 역동기를 보내며 농촌에서 조상의 땀을 지키며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퇴적돼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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