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출신 학생들, 일제강점기 ‘브나로드 운동’으로
문맹퇴치와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3.1운동 전파 과정에 대한 심층적 조사 필요
학생운동, 추가 연구로 구체적 의의 밝혀야
권태휘, 평택 독립만세운동에 영향 적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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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운동사학회와 평택문화원이 광복절을 앞둔 지난 8월 10일 ‘새롭게 밝히는 경기도 지역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2018년 보훈선양학술회의’를 열었다. 평택시립도서관 3층 시청각실에서 열린 이날 학술회의는 경기도 지역 중에서도 특히 평택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국가보훈처와 평택시가 후원한 이번 학술회의는 박종연 수원대학교 교수와 서태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이 각각 1부와 2부 사회를 맡았으며, 김형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이 좌장을 맡아 3부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조규태 한국민족운동사학회장과 정수일 평택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상임추진위원장, 김은호 평택문화원장, 원형재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 유족대표 등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평택시사신문>은 이날 학술회의를 중계함으로써 평택지역 3.1운동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기리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이승원 강사/수원대학교
평택지역 3.1운동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아직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이에 대한 자료를 재정리하고 시기별 평택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조사하는 사업이 진행돼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인물들의 현황과 자료들이 종합적으로 확인됐다.
3.1운동이 경성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데 전파된 행적으로 고종의 급서急逝 소식과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는 인적 경로, 인근지역에 의한 전파 등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평택지역 독립만세시위 전파 경로를 살펴보면 3월 9일 현덕면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그 다음날 오성면과 청북면에서 전개됐으며 동시에 평택역 일대에서도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3월 21일 북면 야막리와 3월 31일 북면 봉남리에서 10일 간격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 1일에는 부용면과 송탄면, 청북면, 고덕면, 북면 등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됐다.
이와 같은 전개양상을 살펴보면 평택지역 3.1운동 만세시위는 크게 현덕면·청북면·오성면 등 제1권역과 평택역 일대를 중심으로 평택전역의 제2권역, 고덕면·북면·서탄면 등 제3권역 등 3개 권역에서 이뤄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중 제1권역과 제3권역은 천도교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동안 3.1운동 연구에서 민중의 독자적 행동인지 중앙 조직에 호응하는 형태로 일어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평택지역 3.1운동 만세시위에 구체적으로 천도교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쳤는지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3.1운동 만세시위 조사 자료를 종합하면 전반적으로 천도교의 영향력이 중심이 되면서 초기에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4월 1일 이후 시위가 확산하면서 농민 등 민중의 참여가 두드러지며 점차 조직적인 만세시위에서 간헐적이지만 자생적인 만세시위로 전개됐다고 볼 수 있다.

■ 진주완 강사/숭실대학교
연구 결과 평택지역 3.1운동 만세시위의 주동자로는 상인·고용인·학생·공무원 등 다양한 계층이었고 20~30대의 젊은 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평택지역 3.1운동 만세시위가 타 지역과 연계해 펼쳐졌다는 점, 여러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났다는 점, 횃불시위 형태로 진행됐다는 점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평택지역 3.1운동 만세시위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보완해야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2010년대에 들어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자료 등 기존에 활용하지 못한 자료가 추가로 등장하고 있다. 이를 활용해 기존 자료에 대한 재검토 역시 필요하다. 또 일제강점기 자료에 나타나지 않은 내용이 후대 기록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 이에 대한 비교 작업이 필요하다.
평택지역 3.1운동 만세시위에 대한 시공간적 검토를 한 결과 평택지역 만세시위의 최초 시작점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삼일운동비사>의 경우 3.1운동이 벌어진 뒤 40년 뒤에 작성된 기록이므로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매일신보> 기사와 일제 기록 등 3.1운동 만세시위 당시 작성한 자료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 박경 강사/서강대학교
평택도 일찍부터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역으로 이곳 출신 학생들은 서울로 유학해 일찍부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평택출신 학생들은 ‘브 나로드운동’으로 한글 보급에 앞장서면서 문맹퇴치의 교육운동, 문화운동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서울의 휘문보통고등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 배재보통고등학교 등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이 하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와 평택지역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강습소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평택지역에서 브 나로드운동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33년 8월 12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당시 진청학원에서 열린 계몽운동 강습소가 내 시작부터 방해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강습소는 학생 200명을 모아 진위군청에 강습인가서를 제출했으나 인가를 받지 못해 수업을 진행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진위청년회와 학생들의 브 나로드운동이 연합해 이뤄졌다는 점, 2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신청했다는 점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실제로 일제가 1935년 브 나로드운동을 전면 금지해 이 운동이 좌절된 바 있다.
평택에서 전개된 3년간의 브 나로드운동은 문맹이었던 많은 이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했고 이들은 여러 책과 신문을 통해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 또한 브 나로드운동은 1934년 멈추게 됐지만 서울에서 유학하던 학생이 학업을 접고 평택의 무산아동을 위해 학교를 설립해 그 뜻을 이어가기도 했다. 앞으로 이 브 나로드운동에 참가했던 대원들, 강습소를 다녔던 학생들의 이후 활동이 밝혀진다면 평택지역 브 나로드운동의 의의를 더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 성주현 연구교수/청암대학교
1919년 3월 1일 전개한 3.1운동을 계기로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됨에 따라 다양한 청년단체가 조직됐다. 당시 청년단체들이 조직된 배경은 무엇보다도 3.1운동의 경험이 컸다.
평택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7년 3월 17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평택의 청년 유지들이 야구부를 조직하려고 준비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한 후속 기사는 없지만 당시 체육을 통한 청년단체로 진위청년체육구락부가 조직됐다. 이 구락부의 결성 목적은 체육 발전이었으며 사무소는 병남면 평택리에 두었다. 그렇지만 체육구락부는 곧이어 조직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바로 진위청년회로 전환했다. 당시 보도된 기사를 비교해보면 1917년 3월 청년야구부에서 1921년 5월 15일 평택청년체육구락부, 1921년 6월 11일 청년구락부, 1921년 6월 19일 진위청년회로 이어지면서 조직됐다. 진위청년회 조직 당시 임원과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이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또 조직 당시는 아니지만 면장 또는 교사, 도 평의원 등 식민지배 기관뿐만 아니라 소작인조합회, 농회, 금융조합, 등 지배체제에 협력하는 관변단체에 참여했다는 특성이 있다. 이들은 <동아일보> 등 지역 언론기관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진위청년회는 크게 다섯 가지 활동을 전개했다. 첫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내부 활동, 둘째 지역과의 사회활동, 셋째 대외활동, 넷째 체육행사, 다섯째 교육활동 등이다. 이러한 진위청년회가 교육운동으로 심혈을 기울인 것은 진청학원이었다. 진위청년회는 1930년대 초 진위청년동맹으로 조직을 전환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명맥만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평택지역의 청년운동은 지역적으로 평택역 일대와 서정리역 일대로 양분됐다. 평택역을 중심으로 진위청년회가 주도했으며 서정리역 일대는 서정리노동조합 등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청년들 중심을 전개됐다. 특히 진위청년회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체제안정적인 틀을 도모했다고 보여 진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진위청년회를 통해 자신들의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 황민호 교수/숭실대학교
일제의 기록과 우리의 기록에 다른 점이 많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이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김세환은 3.1운동의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일제시기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기독교계 교육가이며 민족운동가였다. 한말 한성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이며 귀국 후에는 수원강습소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해 수원지역 교육계의 지도자가 됐으며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
3.1운동 과정에서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한 김세환은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순회위원 자격으로 동지들의 규합과 3.1운동의 취지를 알리는데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또 김세환은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지는 못 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3.1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일제의 조선지배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솔직하게 밝힘으로써 민족대표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 그는 수원지역에서의 3.1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러한 노력은 적어도 경기 남부지역에서 3.1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김세환은 3.1운동 이후에도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조선기독교 창문사를 통한 기독교문화운동의 전개와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했다. 또 신간회운동의 주도와 수원체육회를 통해 일제하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이 민족주의적 성격을 견지하며 사회주의 운동과 경쟁할 수 있는 대중적 토대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한 민족운동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 조규태 교수/한성대학교
권태휘는 평택 북면 가곡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운동가다. 그는 평택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그리고 그는 1920년대 공창폐지운동을 벌이고 형평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여권신장운동과 사회운동의 선구자다. 해방 이후에는 신국가 건설을 위해 활동했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권태휘는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의 횃불을 수원과 평택에서도 일으키려고 했다. 그는 1919년 3월 초순 평택 포승 희곡리 이민백의 집에 가서 “지금 조선 각지에서 금번의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고 있는데 수원군과 진위군만 독립만세를 고창하지 않고 있다. 기일은 곧 통지하겠으니 그때 이장을 지휘해 만세를 고창케 하라”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권태휘의 고향인 진위 가곡리와 이민백의 거처 포승 희곡리는 각기 평택의 동쪽과 서쪽에 있었다. 권태휘가 자신의 집에서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희곡리에 간 것은 그의 희곡리행이 특수 목적을 띤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는 가곡리에서 희곡리에 이르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도 3.1운동을 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평택지역 독립만세운동의 발생에 미친 권태휘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사회문제 해결과 같은 개량적인 운동에 참여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인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2년을 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돼 있었기에 항일투쟁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던 것이다. 1920년 모종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다가 징역 10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른 그는 다음해에는 태평양회의 개최에 맞춰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독립만세시위를 하려다가 체포돼 1년 6개월을 받고 형을 치렀다. 신간회를 조직하기도 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의 사원으로 근무했으며 <조선일보>에서 나와 1934년 경 <신조선사>를 설립했다. 해방 직후에는 안재홍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했으나 이후 사회주의자와 연계해 인민공화국 활동을 전개했다. 6.25전쟁 이후 사회주의 체제를 동경한 그는 북한으로 갔다.

■ 종합토론
여섯 명의 학술연구발표에 이어 여덟 명의 토론자가 각각의 의견을 개진했다.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사는 이승원 수원대학교 강사의 발표에 대해 “평택지역을 3개의 권역으로 나눈 것에 대해 공간적 범위와 시·공간적 범위로 다르게 지정하고 있어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며 천도교 이외에도 다른 특징이 존재하는지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은 진주완 숭실대학교 강사의 발표에 대해 “각종 자료와 조사·연구를 통해 평택 3.1운동이 3월 9일 최초 전개된 것으로 기록됐는데 공신력 있는 문헌이나 설득력 있는 연구 없이 추론에 의해 평택의 최초 봉기일을 추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 방법”이라고 문제 제기를 했다.
최혜주 한양대학교 교수는 박경 서강대학교 강사의 발표에 대해 “지금까지 크게 주목하지 못했던 평택지역의 학생운동에 대해 검토해 새로운 사실을 밝힌 점은 학문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은 성주현 청암대학교 교수의 발표에 대해 “초기 진위청년회의 조직 목적이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는 것에 의구심이 들며 신문 사료 분석에만 의존해 아쉬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은 황민호 숭실대학교 교수의 발표에 대해 “김세환은 수원지역 사회운동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를 수용했던 세력으로서의 김세환에 대한 연구와 그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동언 선인역사문화연구소장은 조규태 한성대학교 교수의 발표에 대해 “권태휘가 옥고를 치를 당시 판결문을 보면 또 다른 인물인 김영창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총괄토론자로 나선 강혜경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는 “평택지역의 경우 좌익과 우익이 함께 존재하면서 융화되고 어떻게 노선을 달리했는지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또 평택지역에는 유학생들이 많아 이들이 서울과 연계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돼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한다면 평택지역 독립운동의 특성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성운 동국대학교 강사는 “젊은 연구자들이 기존의 기록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한 것이 굉장히 인상 깊게 느껴지지만 천도교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에 대해 근거가 부실하다. 교통로, 시장 등 지역에 대해 더욱 소상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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