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가을입니다. 함부로 쓸쓸해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어느새 쓸쓸함이 온 몸으로 파고드는 계절 앞에 우뚝 서 있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나무들만 무수히 잎을 떨어뜨리며 가을을 온 몸으로 맞는구나 싶었는데 막상 계절 앞에 당도해 보니 그것이 비단 나무들만의 일은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낮 동안 사람의 온기를 담지 못한 방에는 한기가 돌고, 새벽녘 창문에는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여름내 베란다에 놓아두고 푸르름을 만끽했던 진초록의 스킨답서스도 이제는 안으로 들여놓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추수가 끝난 논은 어느새 황량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 멀리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것도, 낯모르는 이와 마주앉아 있어도 삶의 깊이에 대해 논하고 인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역시 이 계절이 주는 감성 탓이겠지요.

오늘 오후에는 지인으로부터 한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결혼 20주년을 맞아 기념책자를 만들고 싶으니 도움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파일에 첨부된 글에는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는데 연애시절의 이야기며,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었던 이야기며, 현재의 모습들이 때로는 시의 형태로, 때로는 수필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의 글을 그다지 수정하지 않았다”는 문구에는 그 시절의 감성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부연설명도 있었습니다. 중년의 나이를 살고 있는 지인은 아마도 결혼 20주년을 맞아 가족과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나 봅니다.

가을이라서 그랬을까요, 그 글들을 찬찬히 읽으며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요. 누구나 젊은 한때 뜨거운 연애를 거쳐 결혼에 이르지만 그 결혼생활을 아름답게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에 이르니 그 글을 쓴 중년의 내 지인이 참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가을을 말하라면 중년의 나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시간으로 치자면 오후 네시나 다섯 시 정도, 무엇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엇을 포기하기도 어려운 시간이지요.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중년의 나이도 그러합니다. 무엇을 시작하기도, 그렇다고 무엇을 포기하기도 망설여지는 나이, 인생의 가을이 주는 쓸쓸함은 그런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긴 겨울을 견뎌내는 나무들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길고 긴 노년의 시간을 위해 지금부터 잘 견뎌내는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혼자서 겨울바람을 견디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혼자서 꿋꿋하게 견뎌낼 준비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가을 속에 우뚝 서 있는 나무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어쩌면 중년의 나이에 있는 내 지인도 가을의 나무처럼 누구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태풍이나 비바람, 작열하는 태양을 잘 견뎌낸 뒤에야 가장 아름다워지는 나무들처럼 내 지인에게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역시 모든 것을 이겨낸 뒤에야 비로소 갖게 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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