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유세기는 전국 5대 놀이패인
남사당 진위패를 육성했으며
한국농악협회 초대 회장으로
시조 교육을 표준화했다

 

유준홍柳俊弘·유세기柳世基, 남사당 진위패 조직·운영 힘써
남사당 진위패, 흥선대원군에게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 받아
유세기, 안성경찰서 경부 재직 때 유일하게 남사당 활동 허가

 

▲ 남사당 진위패 육성자 유세기의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모습




Ⅲ. 평택의 예인藝人
3. 농악

2) 남사당 진위패男寺黨 振威牌 육성자와 명인

■ 유세기柳世基

유세기는 1900년 초 전국 5대 놀이패인 남사당男寺黨 진위패振威牌를 육성한 아버지 유준홍柳俊弘과 어머니 박납천朴納天의 다섯째 아들로 1893년 지금의 진위초등학교 정문 앞인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 333번지에서 태어났다. 유세기의 집은 당시 진위군 봉남리 관아 인근 진위객사 앞에 있었다.

유세기의 아버지 유준홍은 진위현 관청의 아전衙前이었다. 아전은 이서吏胥라고도 불리는데, 크게 경아전京衙前과 외아전外衙前으로 구분됐다. 유세기의 아버지 유준홍은 외아전이면서 진위지방 출신으로 대대로 아전을 해온 향리鄕吏였다. 외아전인 향리는 조선 초부터 과거응시 자격이 대폭 제한되었으며, 녹봉도 없었고, 세종조부터는 이들에게 주어오던 외역전外役田도 혁파되었다.

유세기의 아버지 유준홍柳俊弘은 관리로 일했지만 녹봉을 못 받았기 때문에 솥을 만들어 파는 솥전을 대대적으로 운영했다. 솥을 만드는 솥전을 운영하려면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는데 필요한 사람들은 전국에서 농악에 소질 있는 풍물꾼들로 뽑아 종업원으로 등용했다. 풍물꾼들은 평소에는 솥전에서 솥 만드는 일을 하게 했고, 주문이 없는 한가한 겨울철에는 틈틈이 농악을 배우도록 했다.

1867년(조선 고종 4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자 경복궁 건축에 참여한 인부들의 흥을 북돋아주기 위한 위안공연을 진행했다. 이때 유준홍이 육성한 남사당 진위패는 흥선대원군 앞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 대원군으로부터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라는 농기 대도방기都大房旗와 3색의 어깨띠를 하사받았다. 또 당시 상쇠를 맡았던 김덕일에게는 ‘오위장五衛將’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그 당시 남사당 진위패가 웃다리농악을 대표할만한 출중한 실력이 있었고, 전국에서도 유명한 존재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유세기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전통 풍습을 금지하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기 때문에 남사당패 활동을 위해서는 경찰 허가를 받아야 했다. 유세기는 이 시기 안성군경찰서에서 경찰서장 바로 아래 직급 간부인 경부警部로 재직 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남사당놀이를 금지했으며, 해당 지역 경찰서장이 허가를 내줘야만 판을 벌일 수 있었다. 시대적으로 풍물과 걸립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안성군경찰서에서만 남사당놀이를 허가해주었는데 여기에는 경부였던 유세기의 영향이 컸다.

경기도 진위振威, 충청도 회덕懷德과 당진唐津, 전라도 강진康津, 황해도 구월산, 경남 남해南海 등 전국적으로 산재해있던 사당패들은 휴면상태로 고사 직전에 있었으며, 유세기가 사당패를 허가해준다는 소식을 들은 예인들은 평택과 안성지역으로 집중 이주하게 됐다. 이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 재능을 썩히고 있던 전국의 남사당패들은 평택 진위 봉남리와 안성 청룡사를 본거지로 사당패의 중심지가 됐던 것이다. 진위사람 유세기의 결단으로 인해 평택, 안성, 화성 등지의 농악은 이른바 경기농악의 전형적인 특징인 두레농악과 걸립패농악의 특징을 갖게 됐으며, 이러한 웃다리농악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역, 강원도 영서지역 등 매우 넓은 지역으로 분포되어 왔다.

남사당 진위패로 활동한 인물로는 이운선李雲仙이 있는데 이운선은 진위패의 곰뱅이쇠로 그는 진위패 덧뵈기쇠 이경화를 가르쳤다. 이경화는 안성 청룡사를 거점으로 당시 조정朝廷까지 출입하던 바우덕이의 힘을 빌려 안성 개다리패 초보자들에게 덧뵈기를 가르쳤다. 이경화가 덧뵈기를 가르친 사람으로는 평택 출신 최경선, 이천 출신 정성보와 이일용, 안성 출신 이재근과 이복만, 함경도 안변 출신 이성근, 충청남도 당진 출신 김근배와 정일파, 충청남도 대덕 출신 양도일, 충청남도 괴산 출신 남형우, 경기도 출신 최성구, 충청남도 은산 출신 송순갑 등으로 이경화는 그들과 함께 1930년대 중반까지 순회공연을 진행하였다.

1970년대에 와서 이 덧뵈기는 이경화의 후예인 안성 복만이에게 사사한 김근배, 정일파, 양도일, 남형우, 최성구, 송순갑 등과 그들에게 다시 배운 평택 출신 최은창과 송창선, 그리고 충청남도 천안 출신 지수문, 경상남도 진주 출신 송철수 등에 의해 명맥이 이어져왔다.

이처럼 남사당男寺黨 진위패振威牌는 안성 바우덕이패에 속한 예인들을 비롯해 다른 행중의 예인들까지 가르치는 등 전국적으로 많은 남사당패에 예능을 연마시켜주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이 무동놀이 등 사당패의 연희성과 걸립굿 등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은 남사당 진위패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유세기는 시조에 대한 이론이 해박하고 시조를 부르는 예능적 자질이 뛰어나 1957년 등간본으로 <시조창법時調唱法>을 발간했다. 이 책은 시조를 부르는 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시조 입문서이다. 이 책에는 시조를 부르는 원인原因, 계통系統, 종류種類, 시형時形, 박자拍子, 장단長短, 성휘星彙, 악보樂譜, 격식格式, 가사歌詞, 고시조古時調 등을 장장 150페이지에 담았다. 고시조에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홍익한洪翼漢 등 평택 관련 인물이 쓴 시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시가 포함되어 있다.

▲ 유세기 저 시조창법<時調唱法>

유세기는 이 책에서 과거 시조를 낮게 취급한 적이 있었지만 시조 강습회가 열리고 각 급 학교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보급 활동이 전개됐음을 소개하고 있다. 해방 후 1950~1970년대 시조가 한창 보급될 당시 평택에서도 마안산 등을 중심으로 몇몇 동우회원들이 산에 올라가 시조를 읊는 일이 잦았다. 이후 시조 보급 사업이 성과를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유세기는 한국농악협회 초대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시조 강습법을 연구해 중학교 3학년 정도 수준에서 한 두 시간이면 시조를 부를 수 있도록 표준교육안을 만드는데 성공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세기가 쓴 <시조창법>에 상세하게 담긴 것이다.

“해방 후 갑자기 시조가 나타났다. 전에는 특별한 연회석상에서 기생들이 권주가로 한마디 부르는 법이 있고 그 외에는 충청도 방면을 주로 연마한 지방 인사들이 심심풀이로 모여앉아 읊는 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시조는 사계에서 거의 없어졌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던바 새삼스러이 이를 찾아내어 어느듯 각 급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시조유취를 본받은 각종 책자가 쏟아져 나오고 연구회 강습소가 생기고 심지어 모모 학교에서는 일부러 가객을 초청 하여 다가 창법을 전습한다 등등의 획기적인 대발전을 보이게 되매 이것은 요컨대 三十六년간의 기반을 비로소 벗어난 우리의 자유국가로서 즉 내나라 내 민족의 내 것을 존중하고 지지하자는 거국적 자각의 한 토막 상징인 것이었다.

시조는 과연 우리나라 고전문화의 유일한 존재로서 중국의 율시나 일본의 화가나 그 외 어느 나라 시가(詩歌)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나 군인이나 농부나 학생이나 다 같이 정서를 표현함에 가장 풍류적인 것이다. 필자 어찌 동감뿐 만이리오. 일찍이 소년시절에 한마디 배워둔 관계도 있어 위지 시조짱이나 부르는 편이었으므로 용약자진하여 그러면 나도 다시 좀 더 깨끼어가지고 나의 경영하는 농악협회 사업과 아울러 보급 방면에 한목 보리라하고 여러 가지 참고서를 들추어보며 다시 시조 만에 대한 골자와 근거를 추급하여본 결과 그 중에는 문헌과 율리가 자재하여 일견 명료한 악보를 만들 수 있으며 동시에 누구나 현대적으로 속히 알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그 즉시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전기 각계각층에서의 향상열은 의외로 진첩을 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보급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므로 필자는 다시 전습에 대한 방법을 강구하여 실지 시험한 결과 중학 삼년 정도를 표준으로 불과 한, 두 시간 내외이면 누구나 충분히 요령을 파악하여 능히 독창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면 재래의 그 전습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필자 역시 전술한바 당하여 온 경험도 있거니와 어디서나 다만 그 부르는 사람의 성곡 만을 막연히 흉내 내어 따르게 할 뿐으로 위지왈 시조 한장을 제대로 부르자면 三년 이상이 걸린다는 비과학적인 구식을 여전히 답습하여 초학자들을 아연케 하므로 결국은 중도에 폐하고 마는 이가 태반이며 모처럼 고조된 시조열이 좌절되고 마는 현상이다. 원래 시조는 그 창법이 영시(咏詩)와 거의 동일한 곡으로 四성에 의한 음계로써 시조 시(詩)의 표현을 음영(吟咏)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요, 보통 가곡(노래)과 같이 명창(名唱)을 논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런데 이조말엽(李朝末葉) 이후 위지 조대해음즉폐업(措大解音則廢業)이라하여 일반음악을 천대시하는 동시 일체 교방(敎坊) 방면으로 휩쓸려 나가게 되매 거기에서는 오직 기생(妓生)이나 가객(歌客)들만이 재래의 가곡과 아울러 불러올 뿐이었으므로 그중에는 자연 무식한 건달패들이 잡재하여 자의로 변동 혹은 와전하여 오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며 지금에의 소위 경쪼(京調)니 영쪼(嶺調)니 하여 열이면 열이 다 각기 자기의 조를 주장하여 반박을 일삼는 그 알력이 이에서 기인한 것이요. 따라서 이에 대한 아무런 표준도 형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를 착안점으로 하여 다시금 본서로써 위선 일반 초학자에게 가장 속성법인 첩경을 제시하는 동시 전기 어디서나 제일 말썽인 듯 한 박자(拍子)와 장단(長短)의 원리원칙을 천명하여 사계 제현의 새로운 참고로 공하여 아울러 보급전도에 다소 공헌을 기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유세기는 만년인 1970년대 후반 평택문화원의 요청으로 명창 이동백,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 등과 함께 평택농악단을 창단해 전국적인 공연에 참여하는 등 웃다리농악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1985년 5월 25일 9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진위초등학교 정문 앞에 위치했던 유세기의 집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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