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관한 꿈으로 일궈온 70평생

초등학교도 못 다녔던 시절 고학으로 대학까지
목말랐던 배움, 고향에서 후배들 가르치며 이뤄

 
배움에 대한 목마름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우리나라는 60~70년대를 거치는 동안 먹고사는 일이 힘들었어도 자식을 가르치고자 했던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은 식지 않았다. 그런 교육열이 외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현재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만큼 교육은 한 사람은 물론이고 지역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가난과 배움에 목말랐던 어린 날
“우리가 자랄 때는 대부분 그랬지만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못 다녔어요. 아버지는 한학을 좋아하셨는데 제게도 크면서 한문이나 배우라고 하셨거든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농사짓는 일을 거들었는데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러다 동네에 초등학교를 안다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공민학교가 생겼고 결국 부모님 눈을 피해 일하다가 몰래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곤 했지요”
평택시교육발전협의회 이주상(72) 회장은 가난으로 인해 배움에 목말랐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친구들보다 한참이나 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래도 배울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밭에서 일하다 신발도 못 신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곤 했던 시절이었다.
“공민학교 1년 다니다가 5학년으로 편입을 했어요. 워낙 또래보다 늦은 나이였으니까요. 중학교 갈 때는 엄마한테 울고불고 해서 쌀 한말을 얻어 입학시험 보러 서울을 갔는데 시험에 떨어져서 안중중학교에 2차 모집으로 들어가 만호리에서 안중까지 1시간 가까이 걸어 다녔어요.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 성남고등학교에는 전체 2등으로 들어갔지요”
이주상 회장에게 있어 공부는 고행의 길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갈 수 있다는 말에 들어간 고등학교였지만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탓에 나이제한에 걸려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학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신문배달과 과외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결국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교육의 열정 고향에서 야학으로
“대학교 3학년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기 싫다. 뜻을 찾아 남들이 안가는 길을 가보자 하는 생각 말예요. 그러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처럼 농촌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친구 2명과 같이 평택에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지요. 시골 청년들을 모아 청록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남자와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농촌 주민들을 모아 계몽운동을 시작했어요. 당시 계몽운동 중 하나가 바로 야학이었지요”
이주상 회장은 어린시절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배움에의 열정을 고향에 내려와 자신처럼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을 위한 야학에 쏟아 부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게 느낀 이주상 회장은 이어 중학교 교과과정을 개설하자는 생각을 했고 서부 5개 면을 대상으로 포승면회의실을 빌려 야학을 시작했다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 명단을 적어서 일일이 가정방문을 하며 부모들을 설득했어요.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회의실을 개조한 교실이 넘쳐날 만큼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창 밖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수업을 듣는 학생들까지 생기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교실이 있는 학교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당시 국회의원에 출마한 지역의 돈 많은 분이 선거운동을 도와주면 교실 지을 돈을 주신다기에 그 말을 믿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는데 당선된 뒤에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어요. 참 가슴 아픈 순간이었죠”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의 꿈은 친구 아버님이 현재의 포승중학교 부지를 사서 기부하며 이루어졌다. 목재도 마련된 게 없어서 밤이면 큰 아이들과 산에 올라 몰래 나무를 베어다가 학생들과 함께 교실 두 칸이 있는 학교를 완공했다. 아이들의 꿈을 이루게 해줄 학교 이름은 ‘상록재건중학교’였다.

평택의 교육 한 걸음 도약해야
“살아오면서 교육에 관한 특별한 애정이 많았습니다. 제가 공부에 목말라 했던 것들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지요. 청년시절을 지나면서 평택JC 회장도 했었고 초창기 평택문화원장과 평택농지개량조합장, 경기도의원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모두 교육에 관한 애정과 연결이 되곤 했어요”
이주상 의원은 지난 2010년 3월 경기도내 31개 시·군에 ‘아이낳기좋은세상운동본부’를 설치 하고 평택시 관내 18개 교육기관에 432억 원을 지원토록 해 교육환경을 개선했다는 등의 평가를 받으며 ‘제8회 율곡대상 광역정치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평택문화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평택농악을 결성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도록 한 것과 평택상공회의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산파역할을 했다는 것도 그에게 있어 큰 보람으로 남는다고.
“평택이 발전한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는데 왜 교육부문에 있어서만큼은 전국에서도 꼴찌를 면하기 어려운 건지 모르겠어요. 교육발전협의회에서 꽤 오랫동안 추진해오던 것인데 평택시 조례를 바꾸어서라도 교육부문에 관한 지원을 늘려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평택에 교육특구도 당연히 지정되어야 하구요”
평생을 교육에 관한 생각으로 초지일관 달려온 이주상 회장, 비록 관운은 그를 비켜갔다고는 하나 그가 평생에 걸쳐 이뤄놓은 일들이 향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될 평택의 미래에 튼튼한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까지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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