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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평택의 전통예인-28
박성복 기자  |  sbbark@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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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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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이규남 서각장 기능보유자는
전등사 팔만대장경판에 감동
서각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해
2004년 道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됐다

 

이규남, 1950년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용화리에서 출생
고교 2학년 때 강화도 전등사 팔만대장경판을 보고 큰 감동
1984년부터 3년간 각자장인 오옥진에게 본격적으로 학습
이규남 작품, 평범한 글자를 넘어 문양·그림의 조화로 호평

 

   
▲ 이규남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기능보유자(1950년~)




Ⅳ. 평택의 장인
1. 서각장

■ 이규남李圭男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書刻匠 이규남은 1950년 4월 19일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용화리에서 아버지 이영휘와 어머니 박재순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6·25한국전쟁이 발발해 전쟁 중에 충청남도 논산시 구정면 신교리 303번지로 거주지를 옮겨 초등학교 때까지 살다가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서울로 이주했다.

이규남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화도 전등사에 갔다가 그곳에 보관돼 있던 팔만대장경판과 탁본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때의 느낌은 대단히 충격적이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정도로 감동을 넘어 감전된 느낌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목판에 새겨진 조각과 훌륭한 필체는 놀라움과 경외감마저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규남은 목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남다른 손재주로 나무에 그림도 그리고 남의 이름을 새겨 넣어 선물하곤 했다. 나무에 새기는 작업이 어느 정도의 감각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그였기에 팔만대장경판의 수준 높은 각자刻字 기술과 필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느낌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그 장면이 맴돌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음 한 편에 오래도록 서각書刻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마음만으로 당장 서각書刻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잡아 10여 년간 원양어선에서 선원 생활을 했으며, 이후 20여 년 동안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평택시에서 공직을 마감했다.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긴 목각판을 서각書刻 또는 각자刻字라고 하고, 그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을 서각장書刻匠 또는 각자장刻字匠이라 한다. 한지에 인쇄하는 인출印出을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목판木版이라 하여 글자를 반대로 새겨 인출방식에 따라 인쇄하는 과정도 각자라 하며, 각자를 하는 장인을 각자장刻字匠 또는 각수刻手라 한다.

   
▲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선 이규남 기능보유자
   
▲ 불화 작품을 조각하는 이규남 기능보유자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서각문화가 발달하였다. 동양에서 서각문화의 선구는 중국으로 은대殷代의 갑골문甲骨文, 주대周代의 각종 금문金文, 진대秦代이후의 석각石刻, 당대唐代이후부터는 종이의 사용이 일반화 되었으나 ‘문자의 새김’인 각자는 모필로 쓰는 것 보다 먼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목각판인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는 등 사찰을 중심으로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기술이 전해져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한 많은 목판 인쇄물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금속활자의 사용이 본격화되면서 목판 서각은 퇴화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맥脈이 쇠퇴하고, 현대에 이르러 사진술과 인쇄물의 발달로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이므로 전통기술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각은 서각書刻, 각자刻字, 목판木版 외에도 거울에 새긴 문자, 화폐에 새긴 문자, 도자기에 새기거나 찍은 문자, 옥기, 석경石經, 봉니문자封泥文字, 벽돌 기와에 남긴 문자 등 그 종류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서각들은 탁본拓本이나 인쇄를 하기 위한 새김이 아니지만 분명히 후대의 조판인쇄雕版印刷의 각자 방법과 기술상 연결되는 것은 확실하며 그 선구라 할 수 있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 기능보유자 이규남의 서각은 새김질 기법에 따라 입체감이 달리 표현되고 다양한 운치를 드러낸다.

양각陽刻 기법은 글자나 그림을 이루는 선線의 바깥 면을 파내어 글자나 그림의 형태가 위로 나오게 새기는 기법이다. 양각 기법은 글자나 그림의 외부 선을 새김질 해 외곽 부분을 먼저 파고 그 외의 나머지 바닥을 새김질해 판다.

음각陰刻 기법은 글자의 획이나 그림의 선을 파내어 글자와 그림이 아래로 들어가게 표현한 것이다. 음각 기법은 먼저 획 주변을 정확하게 따라가면서 파내고 이어 획 전체를 새김질해 마무리한다. 양각 기법은 선명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 반면 음각 기법은 담백함을 자아낸다. 음양각陰陽刻은 음각과 양각의 중간 형태로 획이나 그림 선의 중심은 양각으로 하고 선의 외부는 음각으로 새긴 것이다. 글이나 그림의 주변부를 칼로 새김질해 정리한 뒤 획(또는 선)의 중심부분을 다듬고 끌을 사용해 마무리 새김질한다. 음평각陰平刻은 글자의 폭이 넓을 때 사용하는 기법으로 음각으로 파낸 글자나 그림의 면을 다시 평평하게 새김질한 것이다.

이규남의 호는 나무 목木, 시내 계溪, ‘나무가 시내를 이룬다’는 뜻으로 그의 호 목계木溪는 공무원 재직기간 동안 얻은 것이다. 목계는 충주시 부근 마을 지명이기도 한데 1968년 경 인근 송신소에서 근무할 때 알게 된 그 곳은 물이 맑고 청정한 마을이었다.

직장생활 중에도 서각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어서 야간에는 공예학원에 가서 목공예 작업을 배웠는데 일반 조각도로는 팔만대장경을 비슷하게라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혼자 문패도 파고 흉내만 내고 있다가 1984년 드디어 국가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인刻字匠人 철재鐵齋 오옥진(吳玉鎭, 1935∼2014년)을 만나게 된다. 서울에서 3대째 서각을 하고 있던 오옥진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어렵게 찾아간 이규남에게 그는 퇴짜를 놓았다. 한편으로는 야속하면서도 그대로 그만 둘 수가 없어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가 네 번째 방문에서 오옥진의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받는다.

목판에 글이나 그림을 새겨 넣는 서각은 일 자체가 힘들고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인데 제대로 배울 마음이 있는 건지 아닌지를 이규남의 스승 오옥진은 시험해봤던 것이었다. 그 후 그가 원하던 서각을 3년 동안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으며, 2014년 스승 오옥진이 작고할 때까지 자주 교류하고 자문을 구했다. 이규남은 한글서예는 여성에게, 한문은 무불無不 선주석宣柱石, 사군자는 백산 유기곤柳基坤, 전각은 공재空齊 진영근陳永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 진위향교 궐패를 복원하고 있는 이규남 기능보유자

이규남은 서각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도 서예를 하고 있다. 특히 예서, 전서, 여러 가지 필법에 대한 예능을 직접 익혔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훈련을 함으로써 서고書稿의 아이디어도 얻고, 옛 선인의 그림이나 글을 사용할 때 그 필의筆意를 느끼는 능력을 배양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좋은 각자 작품이라면 세 가지가 좋아야 한다. 새겨질 글과 나무, 그리고 서각 기법이다. 책을 많이 보면서 그때그때마다 좋은 글귀를 적어놓고 밑그림을 준비해 두는 것은 이규남의 오래된 습관이다.

이규남이 주로 쓰는 나무는 오래 된 느티나무나 돌배나무, 대추나무로 나무가 견고하면서 결이 좋은 나무를 구하는 것이 제일 기본이 된다. 이규남은 구하기 힘든 대추나무를 얻게 되면 며칠 동안 기분이 좋아 잠을 설치곤 한다.

평택시 비전동 524-13번지 이규남의 집 앞마당에는 늘 큰 목재들로 가득하다. 나무의 수액을 빼내고 3년 동안 비를 맞지 않게 그늘에서 자연건조를 시키는데 뒤틀리지 않은 나무를 사용해야 목판에 글자 새기기가 쉽고 완성된 작품이 비를 맞아도 썩지 않는다. 

대작大作의 경우 완성하기까지 한두 달 정도의 작업기간이 걸리는데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비전동 비전9길 72-86 목계서각공방木溪書刻工房 작업실에서 며칠씩 밤을 새곤 한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식사 때가 되어도 시간이 없어 밥을 거르기 일쑤고 대개는 빵과 우유를 옆에 사다 놓고 작업을 진행한다. 서각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전시회에서 작품이 팔리는 경우도 많지 않지만 이제껏 서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서각에 대한 진한 애정 때문이다.

이규남은 공무원 생활을 할 때 월급봉투를 받으면 당장 집에 쌀이 없어도 나무를 사는 데 돈을 쓰는 일이 많아 항상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왔지만 다행히 아내가 이런 그의 성격을 잘 이해해주는 편이어서 편하게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지금은 20년 공직 생활로 얻은 퇴직연금과 2004년 1월 5일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0호 서각장書刻匠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지급되는 전승지원금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두 할 수 있게 됐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걸린 이규남 서각장의 현판 작품

대개 각자, 서각이라고 하면 글씨가 주가 되는 작품을 많이 떠올리는데 이규남의 작품은 그러한 평범함에 머무르지 않는다. 특히 글자보다는 문양과 그림을 넣은 작품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데 문양은 현대적인 것보다는 와당문이나 고분 벽화의 전통적인 문양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가미해서 만든다.

최근에는 불교, 기독교, 가톨릭 등 종교와 관련된 그림이나 글을 나무에 새기는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

   
▲ 2018년 목계 이규남 서화각전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이규남 기능보유자

목판에 단지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글의 내용이 살아 감동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서각장 이규남의 몫이자 영원한 목표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팔만대장경을 보며 느꼈던 당시의 감동을 새롭게 새겨나가는 작품을 통해 발현하고 있다.

 

 
▲ 글·박성복 사장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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