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통째로 냉장고가 된 듯하다. 연일 혹한이 몰아치고, 물이란 물은 다 얼어붙었다. 한강 하류에 유빙들이 둥둥 떠다닌다. 북극이 따로 없다. 이 혹한에도 서울 동교동 거리 한 귀퉁이의 트럭 좌판에 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귤들은 노랗고, 귤들이 쌓인 무더기는 노랑의 덩어리다. 그 노랑의 덩어리는 겨울 속에 숨은 봄의 전조(前兆)다. 내가 귤 무더기 앞에서 멈춰 서서 노랑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것이 먼저 와 있는 봄이기 때문이다.

서귀포 감귤 밭에서 기름진 땅의 자양분과 햇빛을 듬뿍 받고 염분을 품은 해풍을 맞으며 노랗게 잘 익은 귤들이 육지로 올라온다. 귤은 사철 내내 먹을 수 있지만, 특히 겨울에 나는 게 제철 과일로 으뜸이다. 귤은 둥글다. 사과, 감, 대추, 밤, 귤 따위가 증거하듯 모든 과일들은 성숙하면 둥근 형태를 띤다. 내 무의식에서 둥근 것은 노랑과 결부된다. 노랑과 둥근 것은 한 쌍이다. 둥근 것에 색깔이 있다면 틀림없이 노랑색일 것이다. 둥근 것은 생명의 원숙(圓熟)이 도달하는 도형(圖形)의 궁극이다. 자궁, 젖가슴, 수태한 배 따위가 둥글다. 자궁은 생명이 담기는 그릇이고, 젖가슴은 수유(授乳)로 어린 생명을 기르는 도구다. 둥근 것은 생명을 낳고 기르며 포용한다. 모성과 여성원리의 융합이다. 어머니는 둥근 것의 궁극을 지닌 존재다. 둥근 것은 쫓기는 자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기도 하다. 한 시인은 둥근 것에 대한 예찬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 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수북히 쌓아 놓은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김지하, ‘둥글기 때문에’ 부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가슴에 밀려드는 뭉클함으로 한참 애잔함 속에 잠겨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얼마나 아팠으면 이런 시를 썼을까. 공, 항아리, 귤, 젖가슴, 입술, 엉덩이, 알… 같은 둥근 것들은 모두 부드럽고 매끈하다. 시인은 미친듯이 둥근 것들을 쓰다듬고 싶어 한다. 시인은 제가 철부지가 아니라고 했지만 둥근 것을 쓰다듬고 주물럭거리고 싶은 욕망은 그가 철부지라는 증거다. 철부지들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우선 쓰다듬고 주물럭거리는 법이다. 둥근 것은 모성의 원체험과 관련된다. 세상은 뾰족하고 딱딱한 것들의 천지다. 그 딱딱하고 뾰족한 것들에 얻어맞고 찔리며 살아온 시인이 보드라운 둥근 것들에 매혹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꾸 귤을 손에 들고 주물럭거리는 것은 둥글기 때문이다. 둥근 것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다. 유아기에 빨았던 엄마의 둥근 젖에 대한 무의식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기들은 젖을 빠는 동물이다. 아기들은 발랄하지 않고 우아하지도 않다. 아기들은 배고프면 울고 젖을 물려 배가 차면 잠든다. 아기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그게 바로 동물이라는 증거다. 아기들이 엄마 젖을 빠는 동안 둥근 것에 대한 감각적 친화력이 무의식 안에 만들어진다. 둥근 젖을 손으로 움켜쥐고 입술로 빨던 시절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노랑의 시절이다. 엄마의 젖은 노랑의 기쁨, 노랑의 행복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노랑의 시절을 영영 잃는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방황을 했던 것은 그 노랑의 낙원을 잃어버린 상처 때문이었다. 방황하는 영혼들은 무의식에서 제게 생명의 양식을 넘치도록 주었던 둥근 것을 찾는다. 정신분석학자들이 어른들이 담배를 물고 빠는 것은 유아기 때 젖을 빨며 맛본 원초적 향락을 못 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랑의 시절, 노랑의 낙원에서 추방된 어른들은 불쌍하고 불행하다. 담배라는 대체물은 노랑의 낙원을 잃어버리고 불행의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진 어른들이 기어코 찾아낸 물리적 보상이다. 엄마의 젖을 빨던 행복감을 흡연 습관에 내재된 향락으로 대체하며 이어가려는 이 가엾고 하염없는 인간의 욕망이라니!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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