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희 선생의 국악관현악단 창단과 
악기개량은
위대한 업적

예술부장 지영희의 숨겨진 위대함 증언으로 밝혀져
강직하지만 따뜻한 성품으로 동료 교사의 존경 대상
교육자로서 열정, 국악 사랑이 제자사랑으로 이어져

 

민속음악의 아버지 지영희 선생 40주기 추모공연이 지난 12월 12일 한국소리터 지영희홀에서 화려하게 진행된 가운데 추모공연에 이어 12월 17일에는 평택시남부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지영희의 국악예술학교 재직 당시 활동 업적 조명’이라는 주제로 학술토론회가 개최되어 40주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평택시사신문>은 학술연구의 기반이 될 이번 토론회를 지상중계 함으로써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영희 선생의 숨은 업적을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교사들의 증언으로 확인하고 이를 시민과 공유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박성복 사장
평택시사신문

■ 토론 좌장
박성복 사장/평택시사신문

그동안 지영희 선생에 관한 연구는 악기 연주나 관현악단 창단, 영화음악, 국악 현대화 등의 학술연구가 대부분이었지만 국악예술학교 재직 당시에 진행됐던 국악교육 체계화나 악기개량 등은 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지금까지 부족했던 이러한 부분을 조명함으로써 지영희 선생에 대한 업적을 되새기고 보다 체계적으로 지영희 선양사업을 추진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임일남 총장
전. 남부대학교

■ 기조발제
임일남/전. 남부대학교 총장

국악 사랑과 헌신적인 제자육성 존경
교사 재직 당시 후진 양성 의욕 펼쳐

본인은 1960년 5월 국악예술학교 개교부터 10년간 교무부장, 기획부장, 서무과장을 겸임했다. 당시 예술부장을 맡고 있던 지영희 선생과는 동료이자 학사운영의 파트너로서 그분의 국악사랑,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제자육성에 동료 교사로서 존경한다. 
초창기 학교는 교장 박헌봉, 상임이사는 박귀희 선생이었다. 교과는 인문교과 60%, 예술실기교과 40%로 편성되었다. 월~금요일은 7교시까지 정규수업, 8~9교시 자율학습이었고 토요일은 4교시 정규수업, 5~6교시 자율학습으로 자유롭게 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월~토요일 오전 4시간은 인문과 시간이었고 음악시간은 인문과 시수에 포함됐다. 예술실기교과는 월~목요일 5~6교시는 전공, 7교시는 부전공, 8~9교시는 각자 부족한 과목을 자유롭게 학습했고 필요한 경우 담당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금요일 오후 5~8교시는 전교생이 모여 기악합주와 농악연희 등을 종합적으로 시연했고 무용, 농악, 탈춤 등은 별도로 연습했다. 
당시 학교는 두 개의 큰 표어를 가지고 실천했다. 하나는 ‘먼저 인간이 되자’. 예술인으로서 인격과 품위,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서 실력을 갖춰야 박수와 존경을 함께 받는다는 의미였다. 둘째 ‘공연 연습을 통한 실력배양’이다. 교내외 행사나 국가적인 대행사를 위해서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부문별, 종합적으로 손발을 맞춰야 했고 합주연습은 필수였다. 
지영희는 금요일 오후 합주단 시간과 토요일 오후시간에 다른 학생들을 타 예술과 교사의 묵인 하에 자기 제자처럼 마음껏 가르치고 지도해 후진양성의 의욕을 펼쳤다. 선생은 국악예술학교 개교와 함께 예술부장 교사로 취임해 ‘물 만난 고기’처럼 정성과 혼신의 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따르던 제자들이 많았다. 여기서 학생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고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으로 발전했다.   

 

▲ 심형무 교장
전. 서울국악예고

■ 기조발제
심형무/전. 서울국악예고 교장

강직한 성품이지만 따뜻한 인간미
가·무·악의 조화 강조하는 교육관 

본인은 지영희 선생과 13년간 함께 근무했다. 예술부장이던 지영희 선생은 당시 50대 초반이었고 가야금 성금연 선생은 40대로 잉꼬부부처럼 매일 출퇴근을 같이 했고 농담을 자주 해서 교무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평소 말수는 적으나 인자하고 인정이 넘쳤으며 친절해서 남을 배려하는데 인색하지 않아 교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예술교육에 있어서는 엄격했고 대인관계에서도 공과 사를 구분해 성격이 곧고 불의와 타협하는 일이 없었다. 
아니다 싶으면 사표를 써서 서무과에 제출하고 떠났는데 선생이 사표를 내면 피리, 해금, 타악, 관현악 등 빈자리가 너무 커서 다시 선생을 모시기 위해 교장이 수차례 전화하고 나중에는 예술과 교사 10여명이 선생님 댁을 방문해 사정했다. 강직한 성품에도 따스한 인간미를 갖춘 정이 많은 분이었다. 집에 가보면 악기 전시장이나 악기공방 같았다. 여가시간에도 악기 설계를 직접하고 뛰어난 손재주와 명석함으로 간단한 악기는 직접 만드는 등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념이 대단했다. 방과 후에는 시간에 상관없이 밤늦게까지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했고,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못 싸오는 학생들을 위해 본인 돈으로 빵을 사서 먹여가며 가르쳤다. 
선생은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방송국 출연과 레코드 취입 등으로 생활이 부유한 편이었으며 학생들에게 가무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만능 예술인으로 성장하도록 열심히 지도했다. 선생은 기악전공 학생들도 무용을 배우게 했고, 무용전공 학생들도 가야금을 배우게 했다. 그래야 일등이 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교육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초로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창설했고 이때 단원들은 졸업 후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에 취업했다. 지영희 선생은 본교 예술교육 체계화를 위해 많은 연구를 하고 매년 문제점을 과감히 통폐합 개정했다. 선생이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아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음정이 틀리면 직접 조율하고 연주시범을 보이며 합주지도를 했다. 
선생은 악기 제작자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붕기를 초청해 창고에 악기공장을 설치하고 함께 숙식하며 개량악기 제작에 몰두했다. 악기개량의 목적은 고음, 저음의 풍부한 음색과 넓은 음역으로 다양한 창작음악을 작곡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악관현악단의 창단 효과는 국악계의 대단한 혁명적인 변화였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것이었다. 
천대받고 멸시받던 한민족의 우수한 민속예술을 소중히 지키고 후학들에게 올바르게 전승한 지영희 선생의 대단한 업적은 국악의 혁명적 사업을 완수한 20세기 대한민국 전통예술의 영웅이자 시대를 앞서가는 국악계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이다. 

 

▲ 송선원 교수
전. 남부대학교

■ 기조발제
송선원/전. 남부대학교 교수

지영희기념사업회, 한 단계 도약해야
선양사업, 지원조례로 뒷받침 필요

지영희 선생은 연주자, 교육자, 작곡자, 지휘자로 민속음악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민속음악의 선구자이다. 지영희기념사업회는 2000년에 발족해 전국국악경연대회 등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재조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평택시가 문화산업도시로 도약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지영희기념사업회는 이제 한 단계 도약해 내년부터는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시기이다. 이를 위해 지영희예술제의 확대와 지원, 전국국악경연대회 예산 증액과 장르 확대 지원, 상설공연 지원, 지영희 콘텐츠 개발과 활용 체계화 지원,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시나위 복원과 전승사업 지원, 지영희국악상 제정 지원, 지영희 소설과 드라마, 웹툰 개발 지원, 지영희 생가터 복원 지원 등이 필요하다. 
타 지자체의 사업회 지원조례를 살펴보면 강원도 삼척시 ‘이사부 선양사업 지원조례’, 전라남도 완도군 ‘원교 이광사 기념사업회 지원조례’, 전라남도 ‘명량대첩기념사업회 지원조례’, 홍천군 ‘무용가 최승희 기념사업회 지원조례’ 등의 선례를 찾을 수 있다. 
2020년도는 지영희기념사업회가 출범한지 20년이 되는 해이며, 지영희 선생이 작고한 지 40주기가 되는 뜻깊은 해이다. 지영희 선생에 대한 다양하고 폭넓은 선양사업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평택시 자치법규에 의거, ‘지영희기념사업회 지원조례’를 제정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2021년에는 담당 주무과장, 시의원, 지영희기념사업회 임원, 시민으로 구성된 ‘지영희기념사업회 지원조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회의를 거쳐 ‘지영희기념사업회 지원조례에 대한 규정(안)’을 협의해 확정한 후 평택시의회 의원 발의를 통해 제정하는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 최상화 교수
중앙대

■ 지정토론
최상화/중앙대 교수

지영희 선생이 생전 민속악 전승과 후진양성을 위해 애쓰며 이뤄놓은 국악교육 업적은 모두 소중하다. 그중에서 특히 실용가치가 가장 큰 것은 바로 ‘악보교재’라고 생각한다. 민속악 교육의 혁신을 이룬 악보화작업은 20세기 국악발전의 변곡점이었고 그것을 주도하신 분이 바로 지영희 선생이기 때문이다. 구전심수로 전해지던 민속악 전승의 미비한 점들을 보완하고 기억의 소리에서 기록의 음악으로 전승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영희 선생의 국악교재 연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첫 연구대상으로 지영희 선생이 전승한 모든 민속악을 집대성한 <지영희민속음악연구자료집>의 확대와 재해석한 책 발간이 필요하다. 자료집은 500쪽 분량으로 내용, 기록방법, 장르, 표현 등이 압축돼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전통음악 연구와 연주를 위한 자료로 활용가치가 다소 떨어진다. 이 책의 압축된 내용을 풀어서 여러 권으로 발간하고 악보표기와 실제 음악사이의 문제점을 재해석해 발간할 필요가 있다. 

 

▲ 박승률 교수
전. 한국종합예술학교

■ 지정토론
박승률/전.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지영희 선생은 한국 국악관현악단의 역사를 개척한 시조이다. 그럼에도 선생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 자체에서도 선생에 대한 기록과 업적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지영희 선생의 국악관현악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업적은 국악기개량이다. 선생은 1960년 초 국악예술학교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하면서 곧바로 저음연주를 위해 대아쟁과 대해금을 개량했고 혼자 연주할 수 있도록 5북인 모듬북을 개량해 활용했다. 그리고 연주법이 전수되지 않았던 비파, 월금, 공후 등의 악기를 복원해 연주에 활용했다. 이러한 선생의 악기개량 업적도 제대로 알려진 사실이 없다. 북에 대한 명칭을 오성고, 오음고 두 가지로 사용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무엇인가. 개량악기 편종 제작 당시 제작과 감수에 참여한 분들에 대한 명단과 제작 후 학교에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나. 오성고, 편경 외에도 비파, 월금, 공후, 대해금 악기도 개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을 해 달라. 지영희 선생과 국악협회 간의 구체적인 갈등을 알고계시면 말씀해 달라. 

 

▲ 임봄 이사
지영희기념사업회

■ 지정토론
임봄/지영희기념사업회 이사

평택은 예로부터 전통예인들이 많이 탄생한 고장이었고 지영희 선생이 평택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시민 모두에게 큰 자부심이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지영희 선생님을 선양하기 위해 걸어온 발자취와 노력의 시간에 비하면 아직도 평택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많은 지자체에서 역사인물을 선양하는 것은 뜻을 기리기 위한 것뿐 아니라 그 인물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시민의 자부심을 고양하며 그것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평택은 국제화도시로 나가고 있고 그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평택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정체성을 확립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이에 지영희가 가진 평택의 지형적 태생을 담은 음악과 위대한 교육자의 업적 등은 콘텐츠는 평택을 대표할 만하다. 지영희기념사업회 지원조례를 제정하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시민의 자부심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단초라 생각한다. 이번 학술토론회를 계기로 현실화방안이 모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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