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항수호범시민운동본부,
“민·관 협치로 평택땅 되찾았죠”

 

시민단체 21년 노력, 평택항 매립지 평택 관할 결실
무관심을 관심으로 환기, 대규모 집회 여론형성 앞장
평택항 경계분쟁, 평택시 현안을 넘어 경기도로 확장

 

지난 20여 년을 끌어왔던 ‘평택항 매립지 경계분쟁’이 지난 2월 4일 대법원 판결에 따라 최종 평택시 관할로 결정됐다. 이번 판결로 평택시는 평택항 신생매립지의 96%에 해당하는 2045만 6356㎡, 약 619만평을 관할하게 됐다. 2월 4일은 평택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순간이었고 시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이번 판결을 이끌어내기까지는 평택시는 물론이고 시민과 시민단체, 시·도의원, 국회의원 등 각계에서 마음을 하나로 모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중에서도 경계분쟁 초창기부터 시민 역량을 결집시키고 여론을 형성해 왔던 시민단체는 이번 승소의 가장 큰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평택시사신문>은 평택항수호범시민운동본부 김찬규 상임대표와 이주상 공동대표, 이동훈 경기도운동본부 사무처장 인터뷰를 통해 그간의 소회를 듣고 앞으로의 계획을 듣는 지면을 마련했다. - 편집자 주 -


 

▲ 평택항 경계분쟁에서 최종 승소를 이끌어낸 평택항수호범시민운동본부 김찬규 상임대표(좌), 이주상 공동대표(가운데), 이동훈 경기도운동본부 사무처장(우)이 운동본부 사무국에서 기쁨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Q 평택항 경계분쟁이 시작된 발단은?

김찬규 상임대표 : 처음 시작된 것은 2000년도에 당진시가 헌법재판소에 경계문제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청구를 제기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당진시는 평택시로 상당부분 등기가 나자 복수로 중복등기를 냈고 거기서부터 분쟁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4년 9월 23일 헌법재판소는 당진시 관할로 판결을 냈고 그때부터 평택지역 시민단체에서 분개하며 평택항 되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심지어 평택항 문제에 대해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비치기도 했으며 정치인들도 나서지 않았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판결문 후미에는 이 결과가 불합리하다고 판단될 경우 이의제기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어 이를 계기로 시민운동이 전개됐다.

 

▲ 2015년 4월 8일 평택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평택항 되찾기 범시민궐기대회’

 

Q 대대적인 궐기가 있었는데 당시 상황이 어떠했나?

김찬규 : 2004년 11월 19일 평택항에 있는 평택지방해양수산청 앞 대로에서 해수부라고 쓰인 만장을 불태우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민이 모여 ‘평택항지키기범시민운동본부’를 결성했는데 유천형 씨와 내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평택경찰서 정보과와 협의한 집회 코스는 국도 38호선에서 진행하는 계획이었는데 내부적으로 조금 더 이 사건을 부각시키자는 얘기가 있어서 갑자기 코스를 바꿔 기습적으로 서해안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평택항지키기운동본부 대표 유천형, 평택시발전협의회장 김찬규, 평택시민단체협의회장 현상돈 씨가 여러 차례 경찰조사를 받았고 세명이 책임을 지고 벌금도 각자 200만원씩 냈다. 당시 해병전우회에서 운전을 했던 두 사람도 대형버스 면허가 정지됐는데 우리가 그 사람들의 생계비를 일부 지원해주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안에서 일어난 고속도로 점거 사태 이후에 법이 바뀌어서 고속도로를 점거하면 구속되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우리는 그걸 몰랐던 것이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선상 남양호 부근 평택경계에서 30분간 고속도로를 막고 시위했다. 이동훈 회장이 1호 버스 책임자였다. 버스 19대, 800여명이 참여했고 집회 후에는 평택지방해양수산청 앞에서 만장을 들고 농악을 하면서 해수부라고 쓰인 현수막을 태우는 등 대규모 집회를 했다. 추진 단체로서는 타격이 컸지만 그래도 굽히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 

 

Q 평택항 되찾기 시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이동훈 사무처장 : 2005년 1월 19일에도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평택시와 당진군이 평택항홍보관에서 ‘평택항 상생협약식’을 한다는 정보를 듣고 시민단체가 찾아가서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다. 회의를 저지시키고 계란 세례를 퍼부었다. 그게 평택항 되찾기 시민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송명호 평택시장이 임원들과 간담회를 갖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평택시에 평택항경계변경위원회를 설치해 달라고 해서 승낙을 받았다. 그런데 서너 번 회의를 진행한 후에 유야무야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체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2011년 하순경에야 ‘평택항되찾기범시민운동본부’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뉴평택창조시민연합’으로 해서 우관재·김찬규 씨가 공동의장을 맡아 쌍용자동차 회생 문제를 다루었고, 차츰 평택항 되찾기 운동 조직을 활성화시키자고 했다. 당시 1000여 명이 문예회관에 모여 결성식을 가졌는데 그때부터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후 2015년 4월 8일에도 평택시청 앞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진행했다.

이주상 공동대표 : 당시 나는 경기도의회 재선 의원이자 부의장이었다. 당시 평택항 문제를 다루는 경기도의회 평택항권광역개발추진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현장답사를 가는 버스 안에서 평택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당진시 관할로 된 경계분쟁의 부당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해를 도왔고, 천안 상록연수원에서 1박 2일 동안 연수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 했다. 내가 ‘평택항경계분쟁연구회’ 회장이었고 정수일 씨가 부회장, 평택시 윤승우 과장 등이 함께 했는데 그것이 시발이 되어 이후 연구조직이 활성화됐다.

 

Q 평택항수호범시민운동본부가 결성된 이후 활동은 어떠했나. 

이동훈 : 청와대나 중앙정부, 국회 상임위원회, 관계기관 등에 평택항 신생매립지가 당진시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것에 대한 부당성에 대한 진정을 꾸준히 진행했다. 역대 대통령, 국회의장, 국회 법사위원회, 당시 행정자치부장관 등에게도 탄원서를 냈다. 2004년 이후로 계속해서 올렸는데 2009년 4월 1일자로 안전행정부가 지방자치법을 개정했다. 그때 우리 생각이 확실하다고 느꼈다. 평택시가 평택항 경계분쟁 판결이 억울하면 행정 절차를 밟아 찾아가라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에 더 속도를 내게 됐다. 

김찬규 : 헌법재판소에서 1심 심리재판을 하는데 안희정 충청남도지사가 버스 몇 대를 대절해서 당진시장, 아산시장 등과 함께 왔다. 경기도에서는 평택시민단체에서 서른여섯 명과 경기도 담당직원 한 명이 왔을 뿐이었다. 당시 남경필 경기지사가 대권에 도전하느라 돌아다니던 시기였는데 시민단체에서 평택항 경계분쟁에 관심이 없는 남경필 도지사에 대해 퇴진운동을 벌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경기도청에 찾아가 부지사를 만났고 경기도대책위 구성에 대한 협조승낙을 받았다. 경기도민회의 협조도 받게 되면서 평택항 되찾기 운동이 범도민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경기도민회와 평택시민회, 평택시발전협의회, 평택시민단체협의회, 평택시재향군인회 등 각종 단체에서 총회나 행사를 갖는다고 정보를 입수하면 언제든지 찾아가 평택항 경계분쟁에서 평택시 땅을 찾아와야 하는 논리를 설명하고 단체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정말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 2017년 5월 30일 평택항마린센터에서 열린 경기도 시·군민 회장단 ‘평택항 신생매립지 현장설명회’

 

Q 시민단체에 도움을 준 행정의 역할이 있었다면. 

이주상 : 평택항수호범시민운동본부가 처음 설치되고 나서 윤승우 연구실장과 이성춘 정책실장이 논리를 잘 개발해서 책자를 만들었다. 당시 이형석 평택시 자치교육과 평택항분쟁관리팀장이 논리개발을 많이 했다. 사실상 우리는 행정에 촉구를 할 뿐이었지 모든 행정 행위는 평택시에서 시장의 결재를 맡아 변호인단이나 경기도, 행정안전부에 논리를 정리해 보냈다. 우리는 평택시가 우물쭈물 하지 않도록 계속 압박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정장선 평택시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집권여당 정책위의장이었던 원유철 국회의원의 역할도 컸고, 공재광 평택시장도 뒷받침을 잘 해줬다. 이재영 전 국회의원과 홍기원 국회의원, 유의동 국회의원, 평택시의회와 경기도의회 역대 시·도 의원들의 물밑 지원도 큰 힘이 됐다. 


Q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김찬규 : 정치권이 개입돼 법리에 어긋나는 판결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가장 컸다. 그래서 평택시장에게 중앙 정치권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진시를 자극하지 말자는 생각에서 맞대응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소송 막바지가 되고 보니 혹여 평택시가 열의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동훈 사무처장 등의 발의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1인 시위를 계획했다. 읍·면·동 단체에서도 참여해주었고, 평택시사신문과 평택시민신문, 평택자치신문 등 지역언론에서 다양한 보도와 무료 광고를 게재해주며 힘을 북돋았다. 처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시민들도 1인 시위에 참여하면서 점점 더 중요성을 알고 공감대가 훨씬 많이 형성되었다.

이동훈 : 앞으로 평택항을 세계적인 관광무역항으로 발전시키려면 정치권이 강력히 나서야 한다. 경기도민의 힘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충청권 정치인들도 함께 나서서 평택항을 발전시키는 작업을 빨리 해야만 한다. 평택항수호범시민운동본부가 민·관 협치의 본보기가 됐고, 행정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민간에서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평택항수호범시민운동본부는 평택항 발전을 위해 상생협력 관계를 제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평택항만이 발전하려면 경계분쟁 상황에서 충청남도에서 추진한 연육교 왕복 2차선 건설계획도 최하 편도 4차선으로 변경해야 평택항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단체의 명칭도 ‘지키기’에서 ‘되찾기’, ‘수호’, ‘경기도수호’로 변화했는데 앞으로는 ‘활성화’로 개칭해서 평택항 발전을 꾀하는 단체의 성격을 갖추어야 한다. <평택항되찾기시민운동백서>도 만들고 ‘기념탑’도 세워 평택시민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평택항 수호를 위해 지역 선배들이 노력했다는 사실도 알려야 한다. 

 

Q 끝으로 시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김찬규 : 21년간 평택항되찾기시민운동을 하면서 시·도의원들의 적극적인 협조, 역대 국회의원들, 역대 평택시장, 시민단체 지도층 인사, 지역언론 모두 협력한 덕분에 유종의 미를 거두고 평택의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다. 평택 근현대사에 이 같은 큰 역사를 창조한 적이 없다. 평택시민의 결집으로 이뤄낸 것이다. 앞으로도 더 결속해서 평택항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주상 : 평택항되찾기운동을 21년에 걸쳐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평택시의 내일을 생각할 때 평택시가 경기도뿐 아니라 전국에서 모범적인 지방자치단체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드는 전기가 될 것이다. 이런 전기를 놓치지 말고 평택시장이 앞장서고 경기도지사, 도민이 힘을 모은다면 우리의 앞날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평택시민의 결집된 의사를 더욱 확대하고 내일의 원동력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이동훈 : 평택시 발전과 평택항의 연결성은 중요하다. 인천이나 부산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도시들도 모두 항만을 끼고 발전했다. 수도권의 관문항으로서 평택항의 중요성을 잘 인식해 경기도와 중앙정부가 많은 예산을 투입해 평택항을 키워야 한다. 얼마 전 평택시가 서부권 발전방향에 대해 브리핑을 했는데 서부권 발전방향의 핵심은 평택항이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