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참전전우 계속 도울 것”

 

68년 월남 참전, 유공자 선정 도와
대한적십자사·국제로타리클럽 봉사

 

 

“월남전에서 희생당한 전우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남전, 포화 속으로

김연구(80세)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평택시지회 상임고문은 어린 시절 북해도 탄광 강제징용으로 진폐증을 앓던 아버지로 인해 일찍이 홀로 상경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원래 집안이 대농이었는데, 일제의 수탈이 계속되고 아버지가 징용을 다녀와 병을 얻으면서 형편이 여의치 않게 됐습니다. 17살에 홀로 상경해 신문사에서 먹고 자며 고등학교에 다녔죠”

그는 육남매의 장남으로서 공부만 할 수 없었기에 새벽에는 신문을 배달하고 낮에는 학교에 다니면서 결국 대학에까지 진학했다.

“신문사에서 일하며 야간대학에 다녔는데, 1학년을 마친 뒤 등록금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결국 군에 입대했습니다. 1968년 상병 시절에 월남전에 파견됐죠”

행여 걱정할까 봐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떠났던 그는 어두움이 짙은 밤 베트남에 다다르자 굉장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배가 도착하자마자 포화가 쏟아졌습니다. 실제 전쟁터라는 것이 실감되고 정신이 없었죠. 살 생각보다는 치열한 싸우고 죽음을 맞이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퀴논에 도착한 김연구 상임고문은 운이 좋게도 정보병으로 근무했다.

“저는 사복 근무를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맹호부대나 백마부대 같이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죠. 하지만 도시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총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 벽엔 구멍이 나 있었죠. 그렇게 1년을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봉사로 헌신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전역한 뒤 취업을 하려던 김연구 상임고문은 우연히 신문사 선배의 소개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송탄에서 가내수공업 형태로 일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굉장히 잘 됐습니다. 이후 팽성읍 안정리로 이동해 1971년 한일산업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자를 내고 공장을 운영했죠”

이불과 색동밍크를 만들어 전국으로 유통했던 그는 사업이 굉장히 잘 돼 집에 냉장고만 한 금고를 두기도 했다.

“1974년도에는 친구들과 충남 서산에서 40만 평 규모의 간척 사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댔지만, 여러모로 부침을 겪었죠. 다행히도 기존 사업은 계속 잘 됐지만, 육남매의 장남인 데다 오남매의 맏사위다 보니 가족들을 모두 챙겨야 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김연구 상임고문은 가족들을 챙기기에도 바빴지만, 굉장히 많은 봉사 활동을 하며 환원사업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6년에는 대한적십자사 평택군장년봉사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자연재해가 잦아 연천, 파주 등 여러 지역에서 복구작업을 지원했던 기억이 나죠. 대한적십자사에서 인정받은 공식 봉사시간만 1만 시간입니다”

이외에도 국제로타리클럽에서 활동하며 3750지구 4지역 총재까지 역임한 그는 장학사업 등 다양한 청소년 후원 활동을 전개했다.

“다양한 활동으로 국제로타리클럽으로부터 가족봉사인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 지역에는 소년소녀가장후원회를 만들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죠. 뒤늦게 대학에 다니면서도 청소년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해 강연·상담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월남참전전우를 지원하다

김연구 상임고문은 어느 날 후배의 부탁으로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평택시지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하니 월남전 파병 전사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국가를 위해 죽음의 전장 속에서 싸우다 돌아온 전우들이 홀대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중앙회 정화위원장으로 3년간 활동한 그는 2012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오랜 기간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평택지회장을 지내며 전우들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추진해 왔다.

“제가 지회장을 맡을 당시에는 사무실이 워낙 열악해 개인사무실을 지회 사무실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송명호 시장 재임 시절 평택시에 건의해 결국 평택시보훈회관이 설립됐죠. 특히, 우리 전우들이 유공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월남전 참전용사 중 고엽제 환자만 10만 명인데,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치료라도 제대로 받고 편히 살다 가도록 지원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김연구 상임고문의 생각이다.

6년 전부터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경기도지부 자문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인 그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전우들이 마땅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계획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더욱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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