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의 정서와 감흥이 담긴‘한시로 본 평택’
선조들의 질곡한 삶이 시문詩文으로 남아 평택의 정취를 그려내다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했던 평택은 서울이나 지방을 가기위해 길을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 갔던 곳으로 그들의 다양한 사연과 감회들이 수많은 시문으로 기록돼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들의 시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평택의 옛 모습들은 물론이고 평택에서 살던 사람들의 냄새까지도 고스란히 살아 있다. 특히 시에 나타나는 평택의 모습에는 일반적인 기록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평택이 머금고 있던 정서적인 향기까지 진하게 배어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옛 시詩에 나타난 평택의 모습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은 ‘평택을 노래함(平澤提言永)’이라는 시에서 “언덕 하나 약간 높고 사면이 평평한데/해질 무렵에 돌아와 외로운 정자 올랐더니/ 땅이 바다에 가까워 물고기와 게가 넘쳐나고/ 들은 이미 가을이 깊어 올벼와 메벼가 넉넉하구나// 구름 걷힌 넓은 하늘은 기러기 그림자를 머금었고/ 조수 돌아온 오랜 나루는 생선 비린내 둘렀구나/ 우리 집에 몇 이랑 묵은 밭이 있으니/ 어느 날에나 와서 갈매기 찾아 맹세를 할까”라고 읊었다. 이는 당시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까지 유입됐던 평택의 모습과 가을 무렵 곡식이 영글어가고 있는 평택의 풍요로운 모습, 그리고 속세를 떠나 이렇듯 풍요롭고 아름다운 평택에서 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노래한 시로 평택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평택현에 당도하여(次平澤縣)’이라는 시에서 “금년에는 바닷가 땅에 비가 아니 내려/ 논자리 곳곳마다 메밀꽃이 하얗구나/ 먹을 곡식 같지 않고 들풀인 듯한데/ 메밀대 붉은 줄기가 석양에 처량하네/ 늦게 심은 모포기 몇 치 가끔 푸르거늘/ 저처럼 큰 메밀 심지 않은 걸 후회하리/ 메밀 익어 시장에 가 쌀과 맞바꾼다면/ 가을 되어 고을 곡식 어찌 충당 못할까”라고 읊었다. 당시 가뭄이 든 평택의 들판을 바라보며 백성들이 벼를 대신할 작물을 생각지 못하고 곤궁하게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시로 잘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의 선비 조희일은 ‘진위현(振威)’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열 가구 남짓한 진위현은/ 남쪽에서 오자면 경기도의 초입인데/ 긴 내는 고을 안의 마을을 에두르고/ 우뚝한 나무는 시골집을 보호한다네/ 우편물 다루는 역사라 본래 말도 없고/ 밥상위에 오르는 것은 겨우 물고기 뿐/ 난간에 기대 서리 맞은 나뭇잎 보자니/ 하나하나가 모두 앞 섬돌로 떨어지네”라고 읊어 진위현의 당시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경기도 초입인 진위현의 한 고을 안에 긴 내가 흐르고 조용한 시골 역사의 모습과 물고기만이 밥상에 오르는 가난한 시골마을의 풍경이 잘 나타나 있다.
<백헌집>을 저술한 북벌운동의 주역 백헌 이경석은 “남쪽에서 온 역사의 말이 나는 듯이 달려와/ 주상의 수레가 편안히 진위에 당도하셨다 하네/ 흰 머리로 도성에 머문들 무슨 도움이 되랴만/ 그저 붉은 충정으로 대궐 가까이 있고 싶다네”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옛 선비의 충정을 담은 시에 나타난 진위에서는 세조가 진위에 당도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당시 세조가 물을 마신후 감로천甘露泉이라 했다는 어정御井은 바로 진위면 동천리에 위치한 만기사의 우물이다.
조선중기 양양부사로 정사에 탁월함을 보였던 채팽윤은 조선시대 평택의 통복포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는 ‘아침에 통복포를 건너며(朝渡通復浦)’라는 시에서 “갈원 서남쪽에 포구가 빙 돌고 있는데/ 쓸쓸한 마을 길 하나가 쑥대에 반쯤 묻혀 있네/ 다리 무너져 외나무다리로 사람들 지나다니고/ 조수 떨어지자 어선은 무너진 언덕에 들었네/ 가을바람이 땅에 불어 길손 기러기들 떠나고/ 아침 해가 산을 떠나니 묵은 안개 걷히누나/ 시골 노인이 마당 치워놓고 늦벼 거두다가/ 질항아리에 담긴 술 사발 술잔에 따르누나”라고 읊었다. 갈원은 진위에 딸린 역원의 이름이며 통복포는 통복동에 있던 나루의 이름으로 당시 채팽윤이 본 통복포의 모습은 다리도 무너져 외나무다리로 사람들이 건너다니고 어선이 무너진 언덕에 들기도 하는 조금은 허허롭고 쓸쓸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옛 문文에 나타난 평택의 모습
옛 시들이 평택의 정서적인 부분을 잘 표현해 냈다면 옛 글에서는 당시 평택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유심히 살펴보면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유추해낼 수 있다. 조선후기 평택에서 진사를 지낸 신식은 ‘팽성향교 중수기’에서 “보잘 것 없는 이 팽성 또한 하나의 현이다. 그러므로 향교를 설치한 규모는 비록 다른 현과 같다 하겠으나 향교의 건물이나 제도는 모양새를 이루지 못했다. 여러 선비들이 글을 올려 새로 짓기를 청하였더니 특별히 집을 지으라는 허락이 내려졌으나 작은 고을로서 힘에 부쳐 손을 못 대고 있은 지가 여러 해였다. 현감 정후가 부임하자마자 고을 안의 여러 선비들과 의논해 중수하기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재목과 기와·철물 등에서부터 일꾼이며 목수들의 비용까지를 월봉에서 털어내어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집일을 성사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1685년 8월에 시작해 다음해 4월에 낙성하고 6월에 위패를 봉안한 뒤 그해 겨울에 여러 선비들이 향교 안에 모여 술자리를 베풀고 서로를 치하하였는데 이날 사방의 사람들이 모두 멀리서 와 넉넉히 자리를 빛내주니 경내의 남녀노소가 기뻐하며 손뼉치고 노래하고 춤추었으니 이야말로 팽성 고을의 전에 없던 경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거정은 ‘진위의 객관을 중신한 것에 대한 기문(振威客館重新記)’에서 “진위는 작은 고을이다. 삼도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사신과 빈객의 왕래가 매우 빈번하므로 쇠잔한 백성과 피폐한 아전들이 그들을 전송하고 맞이하는 일에 고생이 심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객관이 누추하고 낡았는데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가 성종 5년에 연안 이후가 수령으로 온 뒤 객관을 중수할 생각을 했다며 “한가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워 옛 터에다가 그 규모를 키워 건물을 지었다. 무릇 대청 다섯 칸과 동헌 두 칸을 세웠는데 모두 후영을 두었다. 상방 두 칸에는 서늘한 방과 따뜻한 방을 각각 양쪽에 붙여 달았고 행랑채를 잇고 담장을 둘렀다. 단청도 새로 하였다. 그렇게 해놓으니 우뚝하여 한 고을의 장관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글에는 평택의 인물로 손꼽히는 원균과 이대원 장군에 관한 기록도 전해진다. 당색을 초월해 문명을 날리던 조선시대 선비 한치윤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록집 <양조평양록>에서 “수군의 대장인 원균이 수군을 통솔하면서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적의 전함을 막아 온 힘을 다해 싸우면서 치자, 왜병들이 배를 버리고 달아나 퇴각했다. 이에 비로소 왜적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지 못해 감히 대대적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남구만은 포승읍 출신의 이대원 장군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전라좌수사 이공 신도비명’이라는 글에서는 “군대가 패전하여 공이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항복하라고 위협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자 배의 돛대에 묶어놓고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공은 죽을 때까지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어 이대원 장군의 충절과 기개를 엿보게 한다.

 
▲ 선조들이 한시로 읊은 배경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자연 풍광과 관아지(官衙址)의 모습이다. 평택 낙조와 팽성객사, 진위면 노송지대, 서탄 높들이들(사진 순서는 시계 방향임)
한시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그린 평택
선조들이 남겨놓은 한시에는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군자의 삶이 잘 표현돼 있어 시를 살피다보면 당시의 자연 풍경은 물론이고 인생철학에 대한 배움까지도 접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한자교육의 중요성을 등한시 하는 동안 우리의 한시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고 역사적 가치를 갖는 시문들도 소멸돼 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시 애호가들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한시 동호회를 조직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한시의 진가를 학문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한시집을 발간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택 서부지역은 주로 현덕면 마안산에 정기적으로 올라가 시를 짓고 읊으며 한시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전해지는데 이 시들에는 평택의 근·현대 모습과 정취가 배어있어 향토 사료로도 큰 의미가 있다.
시문에 나타난 평택의 옛 모습을 보존 계승하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당시를 살지 못했던 후손들로서는 당시를 눈에 본 듯 그려낼 수 있어 그 의미가 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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