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가치, 우리 스스로 지켜가야죠”

농민위해 싸우던 대학생, 농사지으며 농촌 지켜
세종대 농지분쟁 때 간사 활동·평택농민회 결성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농민들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이익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농민을 위해 청춘을 바쳐 싸우며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대학생들도 상당수였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서글픈 역사 속 농민들의 현실과 직면하게 돼 그들의 수고를 먹으며 사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잠시 숙연해진다.

힘없는 소작농 위해 살겠다 결심
“대학 다닐 때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가게 되면 농촌의 참담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수해가 난 농촌을 방문했을 때는 서너 살 된 아이가 한 살 된 아기를 업고 배가 고파 흙을 파먹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참담함에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당시의 심정을 글로 써서 청와대에서 모집하는 수기 공모전에 보내기도 했었는데 그때 글에는 젊은 시절의 제가 농촌을 보며 느꼈던 심정들이 그대로 담겨있어요”
평택농업희망포럼 김덕일(50) 위원장은 1989년부터 평택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기자가 돼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기사를 쓸 거라 다짐했다는 김덕일 위원장은 당시 대학농어촌연구부라는 일명 ‘운동권’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농민 문제에 관심을 쏟았던 것이 그가 기자의 꿈을 포기하고 평생 농사를 지으며 평택에 눌러 살게 된 계기가 됐다며 웃는다.
“세종대학교 재단 측이 소유하고 있었던 땅을 개간해 경작하던 평택 농민들이 재단 측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세종대학교로 시위를 하기 위해 올라온 것이 저와 평택이 만난 계기였어요. 이후 시위는 팽성읍 신대·도두지구에서 계속 이어졌는데 결국 협상은 됐지만 토지반환대책위원회 간사로 일했던 저는 동네 어르신들의 남아달라는 요청으로 인해 계양에 눌러앉게 되었어요. 그때가 1987년 이었죠”
당시 학생신분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던 김덕일 위원장은 부모님들 속을 참 많이도 썩여 드렸다며 잠시 말을 멈춘다. 그러나 고향이었던 수원을 떠나 평택에서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인정해 주셨다고.

평택에서 처음으로 ‘농민회’ 조직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생이 농사를 지으려니 참 막막했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저를 데리고 다니며 농사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셨어요. 그때 배운 농사법을 교과서 삼아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죠. 마을에서 이장도 수차례 했었고 당시 평택에는 없었던 농민회도 조직해 농민들을 위해 힘을 모으며 꾸준히 활동을 했어요. 사람들이 저를 가리켜 평택의 머슴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죠”
농촌에서 보람을 찾으며 청춘을 보낸 그였지만 그렇다고 항상 마음이 편했던 것만은 아니다. 농촌 현실이 아무리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거대 조직에 맞서게 되면 한낱 힘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일들이 그 앞에서 연일 벌어졌기 때문이다.
“2004년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힘겨운 싸움을 하던 당시, 정말 피해를 보는 것은 농민임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문제들이 대의로 표방된 통일이나 반미 문제에 가려지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움을 겪은 일이 있어요. 청춘을 다 바쳐 농민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애써왔는데…”
김덕일 위원장은 당시 그런 상황들이 너무 혼란스러워 한 달 반 정도 집을 떠나 강원도에서 혼자 지내며 생각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칩거할 당시 매일 지인들과 가족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는 그는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은 지금껏 농민들을 위해 뛰어왔음에도 결국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주는 자괴감이었다고 회상한다. 더구나 고향이 아님에도 소작농들의 외로운 싸움을 도와주러 왔다가 청춘을 평택의 농촌에 묻은 그에게 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역감정을 들먹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아이들에게 농업가치 알리고파
“큰일을 겪은 후로는 제 스스로 그동안 가졌던 농민과 농촌에 대한 담론은 잠시 접어두자고 결심했어요. 그리고 저와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농촌에 관한 이런저런 일들을 토의하고 해결해나가는 단체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평택농업희망포럼’을 만들었어요”
김덕일 위원장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다고 털어놓는다. 그건 지역 농민을 위한 일과 농업과 환경이 결합된 일이 그것인데 그중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은 농업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에게 농업과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는 일이다.
“요즘은 아이들 농촌교육과 농업교육을 위해 안중읍 삼정리에서 교육농장을 꾸려가고 있어요. 며칠 전에는 청소년쉼터 아이들이 다녀갔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앞으로는 평택의 로컬푸드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킬 계획을 갖고 있어요”
눈치 볼 상사도 없고 자유로우며 조금씩 덜 쓰면 먹고사는 문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농사꾼의 길이 자신이 선택한 최선의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김덕일 위원장, 농촌의 미래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강조하는 그는 무슨 일이든 해낼 것 같은 우직하고 듬직한 미소를 또 한번 활짝 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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