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종로에서 태동한 ‘평택대학교’
101년 역사를 이어오며 평택에서 지성의 토양을 일구다

▲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전경(1920년대)
지역에 자리잡고 젊은 지성을 배출해내는 대학의 수준은 그 지역 지성의 수준을 말해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나 예술·교육 등 많은 부분이 열악했던 평택에서 최초로 대학의 지성들을 키워낸 평택대학교는 평택에 자리한 1981년 이후 현재까지 착실하게 지역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며 평택의 미래와 함께 꾸준히 성장해오고 있다.

▲ 피어선(A.T.Pierson)박사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시작
평택대학교의 전신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을 설립한 미국 선교사 피어선(A.T. Pierson)은 1910년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해 머무는 동안 한국기독교에 대해 알게 됐다. 한국교회의 사도적인 특성과 희생정신, 그리고 성서연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갈망을 알게 된 그는 한국 땅에 성서학원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의 협성신학교 일부를 빌려 교사로 사용하다가 1915년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89번지에 대지를 마련하고 기념성경학원을 지었는데 이 새로운 학원은 벽돌과 털(毛)·그리고 양회로 지어졌고 집 위까지 양회로 다져져 화재를 예방할 수도 있는 큰 건물이었다. 이러한 건물은 당시 서울에 있는 여러 서양식 건축물 가운데 효시가 됐으며 실내에는 벽난로와 전등이 설비돼 있었다. 또한 기숙사도 본 학원 건축 완공 이후 신축해 명실 공히 아시아에서는 거의 모든 시설이 완비된 성경학원으로 자리 잡았다.
▲ 피어선성경학원 학생들(1910년대)
철저하게 초교파적인 성격을 지닌 학원으로 시작돼 운영에 있어서도 특정한 교단에 의해 좌우됨이 없었던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초기 장로교와 미국 남감리교·미국 감리교 선교회에서 파송된 평의원으로 운영됐고 교사도 세 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와 목사로 구성됐다. 학원 운영은 세 선교부에서 공동으로 했고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오토, 스트렉커 등의 독지가들이 경비를 후원했다.
초대 원장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 미국 남감리회의 하디 선교사가 역임했으며 제2대 원장으로 언더우드가 취임했다. 언더우드가 원장으로 재임할 당시 부원장으로 활동한 사람은 저다인 목사로 1902년 11월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해 원산에서 사역하다가 1908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했으며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언더우드 원장의 후임으로 제3대 원장을 역임했다.
1900년도 초기 한국에는 신학교육 기관이 많지 않았는데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개원할 당시 한국에 있는 신학교는 장로교의 평양장로회신학교·감리교의 협성신학교·성결교의 경성성경학원·구세군의 구세군사관학교뿐이었다.

▲ 제2 6·10독립만세운동 기념비
민족의 격동기 역사와 함께 하다
일제의 지배아래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신문화 도입과 민족운동의 기수로서도 그 사명을 다해왔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대한식민정책은 무단정치보다는 식민지배정책을 더욱 강화했으며 이러한 식민정책은 문화운동과 자치운동을 내세워 일제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했다. 배재고보생 등 여러 학우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시내 6개 고보학생 가운데 특히 제1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지 못했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참가해서도 실제로 만세를 부르지 못한 수십 명의 학생들이 피어선기념성경학원 기숙사에 은밀히 모여 대규모적인 항일독립운동을 계획했다. 반대자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간 이 운동은 바로 1926년 6월 10일에서 15일까지 이루어진 6·10 만세운동이다. 이 운동계획에 참가한 학생들 중에는 피어선성경학원 학생도 포함돼 있었는데 유재헌·노응벽·손병석 등 피어선성경학원 학생들은 실제로 이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피어선학원을 졸업하고 목회활동을 하다 순교한 순교자들도 많았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른 목사도 많았다. 1941년 12월에는 신사참배 문제로 북장로회 선교부가 학원운영에서 손을 뗐고 이에 따라 학원이 폐쇄되기도 했다.
1940년부터 1941년 일제가 선교사들을 추방하자 학감인 김건호 목사가 중심이 되어 피어선성경학원 유지재단 이사회를 유지시켜 나갔으며 1942년에 이르러 ‘흥아성서학원’으로 학원명칭을 바꾸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종교교육부와 연합해 고등성경통신과 운영으로 학교 명맥을 이어나갔다.
6·25 한국전쟁 시에는 북한군이 피어선학원을 점거해 학원내의 문건 일체는 그들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으나 1953년 4월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재개원을 하기에 이른다. 재개원 이전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교사를 재정비하지 못하고 있던 다른 학교의 보금자리로도 활용됐는데 경신중고등학교·대광중고등학교·정신여자중고등학교 등 세 학교가 피어선기념성경학원 건물을 빌려 합동으로 수업을 계속하기도 했다.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은 1956년 학제를 3년제 고등과와 3년제 보통과로 개편해 운영했으며 1959년 10월 23일에는 최거덕 목사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제13대 원장에 취임했다.

▲ 창학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패션쇼(가운데 조기흥 총장)
평택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
피어선재단 이사회는 1960년 10월 28일에 가서야 마침내 피어선중고등학교 과정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1961년 7월 1일 서울시교육위원회에 9학급의 인가를 얻어 개교했다. 1963년도에는 피어선실업전수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1967년 12월 28일 주·야간 9학급, 상과·공예과·원예과 인가를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피어선고등공민학교와 피어선실업전수학교 초대 교장은 최거덕 피어선기념성경학원장이 취임해 겸임했으며 조기흥 현 평택대학교 총장은 1969년 재단이사회 사무국장 취임에 이어 1970년 1월 28일 제2대 피어선고등공민학교 및 실업전수학교장에 취임함으로써 피어선학원이 나가야 할 교육방향의 기틀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피어선성서신학교라는 명칭으로 1981년 3월 2일 평택시 용이동(당시 안성군 원곡면 용이리)에 터를 잡은 평택대학교는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본관건물을 신축하고 신학과·사회복지학과·종교음악학과 등 3개 학과의 학생들을 모집했다.
허허벌판이었던 부지에 삽질을 하고 기초를 쌓는 일을 직접 감독하며 자재 지키는 일을 하던 조기태 관리부장의 말에 의하면 몇 번씩 도둑이 드는 위험을 당하기도 했고 폭풍우가 부는 밤에는 수시로 불안과 공포에 떨기도 하며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고 한다.
문교부로부터 4년제 대학과정의 인가를 받았으나 학력인정을 받지 못한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당시 학생모집은 매우 어려웠다. 1981년 학생면접고사를 실시했던 피어선성서신학교는 80여명의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서울지역 학생들이 50여명으로 가장 많았고 남녀 비율은 7:3 정도였다. 1983년 8월 23일 마침내 상급학교 입학학력 인정학교로 문교부의 인정을 받게 됐으며 1991년에 이르러 정규 대학교로 승격했다.
 
1996년 현재의 ‘평택대학교’로 학교 이름을 바꾼 뒤 2012년 10월 15일 창학 100주년을 기념했던 평택대학교는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착실하게 일궈온 평택대학교는 현재 12만 8832㎡(3만 8970평)의 대지에 교사 17개동을 보유하는 규모로 확대됐으며 5000여명의 재학생과 24개 전공 및 학과와 일반대학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물류·정보대학원, 상담대학원 등 5개 대학원을 갖춘 종합대학교로 발전했다.
지금까지 1만 3000여명의 학사와 2000여명의 석·박사를 배출했으며 10개국 33개 대학과 결연을 맺고 연구와 교육에 관한 국제교류를 펼쳐나가고 있다.
100년 전 기독교적 신념으로 한국에서의 교육에 매진했던 피어선 박사의 뜻을 받들어 현재 우수한 고등교육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평택대학교. 발전하는 평택의 미래와 더불어 젊은 지성들을 키우는 터전으로 더 크고 원대한 비상을 꿈꾸고 있다.

▲ 올해로 창학 101주년을 맞는 평택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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