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평택농민회장 선출
20여 년 농민회 사무국장 역임

 

“평택농민회가 지속해서 지역 농민을 대변할 수 있도록 기반을 세울 계획입니다”

학생운동에 투신하다

임흥락(54세) 평택농민회장은 탄광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강원도 태백시의 중심 황지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셨습니다. 빠듯한 형편에도 부모님은 교육열이 높으셨고, 그 결과 저희 삼형제 모두 강릉에서 고교 생활을 했죠”

고교 시절 임흥락 회장의 가장 큰 목표는 소위 ‘인서울’이었다.

삼형제 모두 공부로는 태백에서 으뜸가는 실력을 자랑했기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목표로 삼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세종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어머니는 재수를 권유하셨지만, 저는 하루빨리 대학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었어요. 부모님은 그만큼 교육열이 높으셨죠”

대학에 간 그는 우연히 과대표를 맡게 됐고,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수강 신청 당시 과대표가 되길 원하는 사람을 묻는 선배의 말을 잘 못 듣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과대표가 됐죠. 덕분에 학생운동에 빠져들었는데, 이때 학교 재단과 평택 팽성읍 신대리 주민 간의 토지 분쟁에 대해 알게 됐고, 주민 편에서 함께 투쟁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 대학교 3학년이었던 임흥락 회장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는 족벌체제의 학교 재단을 규탄하고, 대학 정상화를 외치며 시위하던 도중 전경이 던진 벽돌에 맞아 이마가 함몰되는 사고를 당했다.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고, 해당 사건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시위가 지속해서 이어졌고, 전체 학생 대부분이 유급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했죠”

농활로 닿은 평택과의 인연

임흥락 회장은 대학 생활 내내 ‘죽순회’라는 봉사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수시로 농활을 다녔다.

그는 꾸준히 평택으로 농활을 다니면서 농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2학년부터는 졸업 후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했다.

“농사일을 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머리를 다쳐 입원했을 당시에도 ‘농활을 못 가게 되면 어쩌지’ 고민할 정도로 농활에 심취했죠”

1992년 3월 평택으로 내려온 임흥락 회장은 다른 집에서 품을 팔고 건설 현장에서 돈을 벌며 평택농민회 선배들의 일을 도왔다.

“농민회 형님들 집 사랑채에 기거하며 일했습니다. 일 년 뒤 금곡리 논 2000평을 임대해 처음으로 쌀농사를 지었지만, 제 손에 남은 돈은 고작 9만 8000원이었죠”

그의 생활은 결혼 후 안중읍 용성3리에 정착해 더 많은 논을 임대하면서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내는 농활을 위해 평택을 찾은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닿았고 아내가 졸업한 뒤 결혼하게 됐죠. 두 아들이 생기면서 더 열심히 일한 결과 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평택농민회를 이끌다

임흥락 회장은 본인의 농사일보다도 농민회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활동했다.

평택농민회에서 6년여간 막내로 활동한 그는 점차 후배들이 생기면서 실질적인 사업을 추진하고 책임져야 하는 중간자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쌀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 일어난 쌀 수입 개방 투쟁 당시에는 지역 농민들과 버스 33대에 나눠 타고 서울로 올라갔죠. 팽성 대추리 투쟁, 안중 성해리 금호환경 폐기물처리장 문제 등 지역 현안과 관련해서도 농촌과 농민을 위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임흥락 회장은 작년 2월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무려 20여 년간 사무국장으로서 평택농민회의 실무를 도맡았다.

6년간 수원으로 출퇴근하며 전국농민회 경기도연맹의 사무처장과 정책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각 시·군 조직을 교육하고, 사업을 기획·전달하며 역량을 키웠다.

“기본적으로 농사보다 농민회 일을 중시해서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오랜 기간 사무국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죠”

임흥락 회장은 농업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환경, 식량안보 등 여러 기능을 살려 농업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체험형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시민 여론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그는 농민회가 오랜 기간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30~40대 젊은 회원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봉사와 희생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라는 생각이다.

임흥락 회장의 이러한 진심 어린 노력으로, 평택농민회가 농민을 위한, 농민을 대변하는 단체로 영원히 활동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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