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충렬공 이대원 장군 선양세미나 개최
이대원 출생, 1566년에서 1553년으로 바로잡아야

 

임진왜란의 전초전이었던 정해왜변 당시 전라남도 여수 손죽도 인근 바다에서 왜선 20여척을 무찌르고 장렬히 전사한 평택 출신 명장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업적을 조명하기 위한 세미나가 열려 지역주민과 역사학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함평이씨 평택종중이 주최하고, 평택문화원이 주관한 ‘2023 호국보훈의 달 기념 충렬공 이대원 장군 선양세미나’가 6월 7일 오전 10시 30분 평택시 포승읍 방림리 포승문화복지센터 주민자치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이날 선양세미나에는 유승영 평택시의회 의장과 김광민 해군 제2함대사령부 참모장, 이계안 평택대학교 이사장, 이학수 경기도의회 의원, 공재광 전 평택시장 등 내빈과 이계은 함평이씨평택종중 회장을 비롯한 종중 회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70여명이 참석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계은 함평이씨 평택종중 회장은 인사말에서 “430여 년 전 충렬공 이대원 장군은 죽음이 예견되는 전장에 나가 용전분투 끝에 장렬히 전사했다. 나라가 위기에 쳐했을 때 기꺼이 목숨을 바쳐 산화한 분들은 우리에게 길이 기억되고 숭고한 교훈을 준다”며, “장군은 손죽도와 고흥, 여수지역에서 수호신으로 모시는 등 호남지역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장군의 후임 만호였던 정운 장군의 호를 딴 ‘정운함’이 존재하듯 앞으로 해군본부에 ‘이대원함’ 명명을 신청해 새로 진수되는 해군 함정에 이대원 장군 이름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어 유승영 평택시의회 의장은 “이대원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장군으로 1587년 2월 10일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혁혁한 공을 세웠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외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며, “이처럼 훌륭한 이대원 장군이지만 아직까지 평택에도 널리 알려지지 못해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오늘 선양 세미나를 통해 평택의 인물이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대원 장군의 뜻이 잘 알려질 수 있도록 평택시의회 차원에서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광민 해군 2함대 참모장은 “저는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평택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대원 장군이 이런 훌륭한 분이셨다는 것, 그리고 해군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게 됐다”며, “우리 바다를 지키다 순국한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호국 정신과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깊이 새기며, 해군 2함대 전 장병과 군무원은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고귀한 해양보국 정신을 이어받아, 필승의 신념으로 대한민국 서해를 사수하는 막중한 임무를 완수해 나갈 것을 이 자리에서 다짐한다”고 밝혔다.

이학수 경기도의회 의원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없듯 조상을 섬기지 않는 후손에게는 미래가 없다”며, “우리지역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소중한 역사인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이대원 장군 선양세미나는 기념식 후에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평택의 대표적 호국 인물 충렬공 이대원 장군을 선양하기 위한 강연이 열렸다. 강연은 백승종 역사학자로 강사로 나서 ‘손죽도의 영웅·충신 이대원 장군에 관한 몇 가지 재검토’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 충렬공 이대원 장군 선양세미나  백승종 역사학자 강의 요지

총렬공 이대원 장군은 1587년 선조 2년 2월 순국했다. 여수 손죽도 백성들은 장군이 순국한 다음에 그 섬을 ‘손대도’라고도 불렀다. 원래 ‘손죽도巽竹島’인데 ‘손대도損大島’라고 부른 것은 그 지역 백성들이 이대원 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대원 장군 일대기는 <국조인물>이라는 책에 간단하지만 아주 잘 정리가 돼 있다. 장군은 선조 16년 1583년 무과에 합격했다. 방목에는 이대원 장군이 계축년생으로 기록돼 있으며 거주지는 양성이다. 시험 볼 당시 아버지는 작고하고 안 계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안 계셨다. 당시 어머니만 살아계셨다.

정해왜변이 일어났을 당시 전라좌수사가 누구였냐 하면 신암이었다. 신암은 이대원 장군의 공적을 탐내 그 공을 가로채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대원 장군의 보고를 통해 조정에서 그 사실을 파악했는데 결국 왜적의 2차 침입이 바로 일어났다. 그때 이대원 장군은 출진하면서 직속상관인 심암에게 왜적의 수가 많기 때문에 증원 부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사흘 동안 전투가 계속됐는데도 지원군을 단 한 명도 안 보냈다. 전라좌수사 심암이 상관으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것이며, 일종의 보복 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이대원 장군이 순국하면서 한 편의 비장한 시를 썼다. 옷을 벗어 거기에 피로 쓰는데 그 시가 지금 남아 있다. 생사가 엇갈리는 그 순간에도 마음을 모아 절명시絶命詩를 썼는데 지금 이대원 장군 묘소에는 유해는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고, 옷자락에 피로 쓴 절명시만 묻혀 있다. 

그럼 이대원 장군이 순국했을 때 나이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신도비에는 22세로 기록되어 있다. 22살에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방목이나 호적과 같은 공적 기록이 발견되면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바로 잡는 것이 하나의 관례다. ‘병인생(1566년)’이라고 하면 순국할 때 22살밖에 안 되는데 사리에 맞지 않다. 그러나 장군이 무과에 급제했을 때 작성된 <방목>에는 ‘계축년’에 출생한 것으로 기재됐다. 이대원 장군이 명종 8년(1553년)에 태어났다는 엄연한 기록이다. 바로 잡아야 한다.

이대원 장군은 젊은 나이에 녹도만호가 되는데 무과급제 후 불과 4~5년 만에 10 단계 직급이 올라갔다. 이대원 장군이 함경도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 4년 동안 거의 해마다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유감이지만 사실관계로 보면 그건 명확하다.

끝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이계은 함평이씨 평택종중 회장께서 말했듯 우리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매우 좋은 전통이 있다. 훌륭한 분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장보고함’도 있고 ‘이순신함’도 있고 ‘이억기함’도 있고 ‘정운함’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평택 출신의 훌륭한 장수 이름을 딴 함정이 없다. 이대원 장군의 이름을 딴 ‘이대원함’이 진수될 수 있도록 지역 지도자와 시민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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