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초등교육의 뿌리를 간직한 ‘평택성동초등학교’
평택 근대교육 100년 역사 간직하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다

▲ 제22회 여자졸업생 기념사진(1945년 3월 24일)
▲ 평택성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육군 1군단 창설식(1950년대 7월 5일)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평택성동초등학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지역의 다사다난했던 역사들과도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평택성동초등학교의 역사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평택 근대교육 100년의 역사는 물론이고 그와 더불어 평택지역의 근대사와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팽성읍 서당에서 성동교육 ‘움터’
평택성동초등학교의 공식 개교는 1913년이지만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보다 훨씬 앞선 1904년 충청남도 평택군 읍내면 남산리(현. 팽성읍 남산리) 강난수 씨가 운영하던 개량서당에서부터 비롯된다.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난수 훈장은 평택에서 처음 설립된 한국JC의 창설멤버인 강건원 씨의 조부(祖父)이기도 하다.
평택성동초등학교는 일제 당국의 공립보통학교 중심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의해 1913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령 제26호 ‘평택공립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고시 제72호로 고시되었다. 이후 1913년 6월 3일 당시 행정구역상 충청남도로 되어있던 평택군 읍내면 객사리(현. 팽성읍 객사리) 옛 평택현 관아건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초대교장은 곡본영길(谷本榮吉)이라는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인 송명한이 교사로 부임했고 이듬해 조선인 이영직이 추가로 부임해 모두 3명의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택공립보통학교는 1918년 평택역 부근에 형성된 원평동의 옛 평택세무서 자리(평택면 54번지)에 있는 목조건물로 학교를 옮겼다가 1938년 10월 31일 평택읍 비전리 580번지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 개교했다. 성주한·민광식 등의 주도하에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지방 유지들에게 3만원이라는 거액을 기부 받아 당시로서는 드물게 붉은 벽돌로 된 20개의 교실을 신축했다. 그리고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교명도 ‘평택성동심상소학교’로 개칭했으며 수업연한도 4년제 보통학교에서 6년제로 바꾸었다.
1938년 2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당시 건물은 2층 기와집이었으며 16개 학급에 1000여명의 학생들을 수용해 교육했다고 기록돼 있다.

▲ 평택군교육구자치제실시연합체육대회 우승(1952년 10월 26일)
▲ 1학년 학생들의 덕동산 소풍(1959년)
수많은 역사와 함께 한 ‘평택성동초등학교’
근대 교육시설이 부족했던 평택지역에서 성동초등학교는 지역 초등교육기관의 뿌리였다. 경부선이 지나가는 평택역으로 인해 날로 증가하는 취학 희망자들은 성동초등학교를 비롯한 지역의 야학과 강습소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 진위면의 진위초등학교나 서정동의 서정리초등학교·팽성읍의 부용초등학교·청북면의 청북초등학교·포승읍의 내기초등학교 등을 비롯해 진청학원·서일학원·율북강습소 등은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1941년 ‘평택성동심상소학교’는 교명을 ‘평택성동국민학교’로 개칭했으며 1938년부터 이곳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박남규 씨가 1945년 9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장에 취임했다.
1950년 6월 25일 평택성동초등학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휴교를 단행했으며 1950년 10월 15일 수복으로 개교했다가 1951년 1월 4일 중공군 남침으로 인해 다시 휴교, 그해 6월 5일 다시 개교하는 등 평택의 역사, 나아가 민족의 역사 현장에서 개교와 휴교를 반복했으며 전쟁 당시 유엔군의 오폭으로 인해 평택역과 함께 학교에 폭탄이 투하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평택성동초등학교 학급수가 가장 많을 때는 80학급 정도가 운영돼 전체 학생 수는 4800명에 이르렀다.
1960년대 말로 들어서자 평택은 도시가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하나뿐인 초등학교로는 더 이상 초등교육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69년 평택국민학교·1982년 평일국민학교· 1988년 비전국민학교·1992년 합정국민학교를 각각 분리시켜 운영토록 했다.
평택성동초등학교는 1970년 2월 14일 일어난 대형화재로 인해 학교 건물이 전소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봄방학 무렵이었던 당시 학교에서 숙직을 하던 교사가 지난 시험지를 난로에 태우는 과정에서 연통에 그을음이 가득 차 불이 난 것으로 추정되며 다행히 학생들이 하교한 후라 인명피해는 없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학교건물은 벽돌건물이었으나 계단을 비롯한 내부는 전부 목조여서 계단을 중심으로 불이 옮겨 붙었고 벽돌이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화재로 인해 학교에 보관 중이던 자료들은 대부분 소실됐으며 그래도 수업은 꾸준히 진행돼 학교 별관에서 2부제 수업이 진행됐다.
평택성동초등학교는 큰 건물과 넓은 운동장 덕분에 일제 말기에는 징용자 및 징병자들의 집합소가 되었으며 청년들의 군사훈련 장소로도 활용됐다.
1948년 11월에는 평택군교육회 주최로 정부수립을 경축하기 위해 펼쳐진 제1회 평택군초등학교연합체육대회도 평택성동초등학교에서 개최됐으며 1949년 6월에는 경기도체육회 평택군지부가 주최하는 평택야구대회도 이곳에서 개최되는 등 다양한 체육활동이 펼쳐졌다.
또한 평택성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평택소방대 사열식이나 제일교포 북송반대와 같은 관제집회도 열렸으며 각종 선거유세가 펼쳐지던 정치적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특히 1950년 7월 4일 육군 제1차 개편계획에 따라 다음날인 7월 5일에는 평택성동초등학교에서 김홍일 소장을 초대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수도사단과 제1·2 사단을 예하 부대로 해서 대한민국 1군단이 창설되기도 했다.
이후 1971년 3월에는 ‘평택다목적농업개발사업’ 기공식도 평택성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됐는데 이 자리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삼부요인이 모두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 평택지구다목적농업개발사업 기공식(1971년 3월 23일)
독립운동가 원심창은 2회 졸업생
평택성동초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상해 육삼정의거’의 주역이자 우리나라 아나키스트운동사의 큰 별로 기억되는 독립운동가 원심창 선생이다. 원심창 선생은 평택성동초등학교 2회 졸업생으로 졸업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또한 평택성동초등학교 4회 졸업생으로 1928년부터 청북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 후 1938년 모교를 찾아 교사로 활동하다가 1945년 모교 교장이 된 박남규 교장도 성동초등학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또한 1984년 ‘제2회 MBC 창작동요제’에 참가해 ‘노을’이라는 동요로 대상을 수상한 권진숙 학생도 당시 성동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노을’은 한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맥화실을 운영하던 화가 이동진 선생인 노랫말을 쓰고 선생의 제자였던 최현규 선생이 곡을 붙이며 만들어진 것으로 아름다운 평택 들녘의 풍경을 동요로 읊어 지금도 국민동요로 널리 불리고 있다.
평택성동초등학교는 오래된 초등학교라면 한번 쯤 들었을 법한 전설들도 내려온다. 운동장에 있는 100년 된 나무가 12시만 되면 옛날 공동묘지였던 운동장에서 시체들의 피를 빨아 먹는다는 전설이나 운동장에 서 있는 동물 동상들이 밤이면 되살아나 아이들을 공격하지만 이순신 장군 동상이 그것을 퇴치해준다는 등의 전설은 아련한 추억으로 졸업생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평택성동초등학교는 ‘신언서판(身言書判) 품성을 지닌 쓸모 있는 Top 1% 인재 육성’을 교육지표로 정하고 몸가짐이 바르고 솜씨가 뛰어난 늘품인재 육성·말이 조리 있고 대화가 진솔한 글로벌 인재 양성·글쓰기가 아름답고 생각이 남다른 창의인재 육성·판단이 공평하고 이해가 바른 일품인재 육성 등을 교육목표로 현재 22개 학급에 540명의 학생들이 선배들의 뒤를 이어 학업과 인성을 배우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해방 이후로 따지자면 제24대째가 되는 이종석 교장을 비롯해 97회 3만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낸 평택성동초등학교, 4800여명에 달했던 예전 학생 수에 비해 현재는 극히 적은 수의 학생들이 교육받고 있지만 학교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의 깊이는 평택의 역사와 더불어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지역에서 회자될 것이다.

▲ 성동초등학교 본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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