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송탄 신장동 정착
60년간 광안당안경원 운영

 

“시원섭섭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인생 3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송탄에 정착하다

정서용(83세) 광안당안경원 대표는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되자 고향 서울을 떠나 피란 생활을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남하하는 인민군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가댁이 있는 경기도 광주로 향한 그는 형과 함께 성인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어머니는 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 형과 함께 피란을 떠났어요.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정서용 대표는 1963년 형의 부름을 받아 송탄으로 왔다. 그의 형은 앞서 1960년 K-55 정문 앞에 신장동 최초의 안경원을 차렸다.

“형은 대전의 한 안과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고, 영어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송탄에 정착했죠. 저도 형을 돕기 위해 송탄으로 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살고 있습니다”

그가 회상하는 60년대 초반 신장동 모습은 열악하고 처참했다. 제대로 된 길이 없었고, 대부분 나무판자를 덧대 만든 판잣집이었다고 한다.

“신장동은 60년대 미군들이 현재 ‘신장쇼핑로’에 해당하는 길을 내면서 점차 발전했어요. 70년대엔 미군 수가 증가하면서 더욱 북적였죠. 이후 80년대 정부가 기지촌에 연립상가를 지을 수 있게 특별법을 만들어 허용하면서 지금의 형태가 갖춰졌습니다”

 

안경원을 운영하다

정서용 대표는 사회 활동으로 바쁜 형을 대신해 안경원 운영을 도맡았다.

70년대에는 미군이 많아 밥 먹을 틈도 없이 일할 정도로 안경원 운영이 잘 됐다.

바쁜 일로 서른다섯이 돼서야 뒤늦게 결혼한 그는 한때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노총각이기도 했다.

“당시 미군들이 돈을 잘 썼어요. 송탄의 모든 돈은 신장동에서 돈다고 했죠. 또 안경을 제작하는 데 절차가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미국과 달리 신속하게 제작해서 주니 우리 안경원을 찾는 손님이 많았습니다”

국내 안경사 제도는 70년대 말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관련 면허나 제도 없이 누구나 점포를 내고 운영할 수 있었다.

“안경사 면허가 생기면서 우편으로 책자를 받아 공부하며,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80년대 후반 형님이 서울로 올라가고 난 뒤부터는 계속해서 홀로 안경원을 운영해 왔죠”

안경사 면허가 생겼지만, 불법으로 안경원을 운영하는 이들이 많아 90년대 초반 전국의 안경사들이 서울 올림픽체육관에 모여 처벌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안경사들은 1년에 한 번씩 8시간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러야 해요. 저도 계속해서 교육받고 시험을 치르고 있죠”

 

광안당안경원, 역사를 매듭짓다

정서용 대표는 60년 넘게 평생을 안경원 운영에만 집중하며 살았다.

“한눈팔지 않고 안경원만 운영했습니다. 외부 단체 활동도 하지 않았죠. 심지어 휴무 없이 매일 문을 열어왔어요”

안경원을 운영하며 고객들이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울 때마다 그는 남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두통이 심한 사람 중에는 난시를 겪는 경우가 있어요.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동네 주민이 있으면 검사를 권유하고, 난시가 맞으면 안경을 맞춰주죠. 시력을 교정한 뒤 두통이 사라졌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뿌듯합니다”

정서용 대표는 오랜 시간 안경원을 운영하면서 손님들과 많은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많은 사람으로 붐볐던 신장동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오랜 안경원의 역사도 점차 끝을 보이고 있다.

“90년대부터 미군 수가 줄었습니다. 그래도 정기 훈련이 있었고, 군산이나 동두천 등 타지에서 놀러 오는 미군이 있어 괜찮았죠. 하지만 수년 전 정기훈련이 중단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도래하면서 신장동 일대에 경제적 타격이 컸어요”

벌써 60년 넘게 안경원을 운영 중인 정서용 대표는 수년 내로 점포를 정리할 계획이다.

“지속해서 안경원을 운영하려면 더 투자하고 시설을 넓혀야 하는데,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지금은 봉사하는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죠”

그는 은퇴 후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생각이다. 시원섭섭하지만, 누구나 겪는 일이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정서용 대표의 생각이다.

수도 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프렌차이즈 안경원을 보면 6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광안당안경원은 그가 인내로 쌓아온 지역의 역사다. 오랜 시간 인내한 만큼 행복 넘치는 정서용 대표의 인생 3막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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