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아파도 잘 견디는 것이다. 이런 것도 습관이 되는지, 이제는 웬만큼 아파서는 아프다는 것을 잘 못 느낀다. 참아냈던 것들의 부작용이다. 나도 모르게 자꾸 한숨을 쉬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아프다는 신호라고 느낀다. 그때라도 좀 쉬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의 감각이 둔해지면 어느 날 갑자기 최악의 상황과 마주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동물이 고통의 감각을 발전시킨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큰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그 경험들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아 오히려 고통을 심화시킴으로써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을 체득해냈을 것이다. 즉, 고통은 죽음에 도달하지 않기 위한 최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에서 철학도 진리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과 의학은 모두 ‘좋은 삶’을 가르치려는 철학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건강을 철학의 경지까지 이끌었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지점이다. 물론 최근에는 ‘몸 철학’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인간의 육체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철학은 정신적인 영역에서만 머물렀을 것이니 이러한 발견은 대단히 앞서간 사유이다. 

그런 니체가 고통을 예찬하는 것은 왜일까. 니체는 같은 책에서 “커다란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최종적인 해방자”라며 “시간을 끄는 길고 오랜 고통, 생나무 장작에 불태워지는 고통만이 비로소 우리들 철학자로 하여금 우리가 지닌 궁극적인 깊이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들은 가능한 한 고통을 없애고자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지금까지 있었던 것보다 더 높고 힘든 것으로 갖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스스로 신체적 질병을 앓고 난 후이다. 그런 그가 고통을 예찬한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주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다.  

고통이란 그동안 반복해온 행위들이 누적되어 신체 일부가 심각한 위해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이 행위들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내 신체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로 신체가 보내는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일방통행을 계속한다면 신체는 내게 한층 더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억압된 기억이 성인이 되어서도 내게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나라는 유기체가 나의 세포들에게 가했던 행위로 억압되었던 세포들은 내게 심각한 고통과 병이라는 위해로 되돌려주게 마련이다.  

앞서 말한 지식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들이다. 인터넷에는 이러한 정보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실질적으로 내 몸에 고통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저 한낱 지식에 불과하다. 내 몸에 직접적인 고통이 찾아온 후라야 우리는 비로소 그 지식의 실체를 만져볼 수 있고 그제야 그 지식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쁜 일과를 소화해내며 살아가는 우리는 신체에 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물론 건강할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생기게 되면 우리의 생각은 온통 건강에 집중된다. 건강은 곧 육체의 일이다. 육체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의 움직임에 저항이 생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육체가 사라지면 우리의 정신도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러한 생각으로 이끌게 되는 시작점이 바로 ‘고통’이다. 고통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인식의 대전환이다.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삶의 고통 역시 대부분은 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 가슴이 아플 때 진통제를 처방하면 어느 정도 견딜 만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삶의 선봉장이다. 투수가 보내는 사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경기를 잘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선봉장이 고통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보내는 사인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우리는 삶의 경기를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고통은 몸이나 삶을 새로운 상태로 바꾸어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고통’은 그런 점에서 우리를 더 높은 지점으로 이끈다. 중병을 앓고 난 사람에게는 작은 미물의 움직임이나 새싹의 소중함이 더 잘 보인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마저도 그저 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도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며, 계절도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각각의 개별자인 존재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것이니 그것들을 깨닫게 되는 지점이 바로 ‘고통’이라는 신호인 셈이다. 동양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몸에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말고, 삶에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말라”라는 현자의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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