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이 글을 학창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꽤 오랫동안 사랑했다. 마음이 공허하거나 울고 싶을 때마다 자주 이 글을 되뇌며 친구를 그리워했다. 내가 갖고 싶은 친구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이 글에서처럼 나 역시 친구의 범위를 여성이나 남성, 나이의 많고 적음에 두지 않았다. 다만 그의 인품이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친구와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쩌면 가슴 터질 듯한 사랑보다 강물처럼 잔잔한 마음이 오가는 그런 친구를 더 갖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상대 진영에 있던 적을 친구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친구인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내내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 관계를 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건 내가 오래 품고 있는 친구의 기준 탓이리라. 

친구와의 우정에 관해서는 많은 사상가의 이론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헬레니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학파를 만들고 쾌락주의를 주장했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가히 우정의 본보기가 될만하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서 철학 공동체인 ‘정원’을 세우고 많은 사람을 모아 30여 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실천했다. 그와 함께 한 구성원들은 철학자에서부터 창녀까지 다양했는데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비웃긴 했으나 비웃는 사람들조차 에피쿠로스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부러워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관능적인 향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쾌락은 몸에 괴로움이 없고 영혼에 동요가 없는 ‘아타락시아’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가 친구들을 가까이에 많이 두었다는 것은 그런 인식과도 연계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 중요한 이유를 안전이 확보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정의와 마찬가지로 우정도 상호 이득을 위한 것이며 우정이 필요한 이유는 서로에게 유익함을 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에피쿠로스를 비판한 키케로는 ‘유익함’ 대신 ‘정’을 이야기하는데, ‘유익함’이 됐든 ‘정’이 됐든 친구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분명하다. 반대로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나를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친구가 아닌 ‘적’이다. 어떤 이는 친구인지 적인지 구별이 애매한 사람도 있지만 친구와 적을 구별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에 달려 있다. 정치를 두고 소위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정치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영화 <친구>에서도 보듯이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가 조직에 몸담게 되고, 연애나 결혼이 끼어들고, 사회적 지위와 자존심, 콤플렉스 등이 끼어들면서 어느 순간 관계가 소원해지고, 그러다 결국엔 적이 되는 사람도 많다. 

친구가 많은 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은 많은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잘 들어준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고 그 사람을 적이 아닌 친구로 받아들인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쉽지 않다. 적이 되어버린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수백 배 더 어렵다. 그러나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세상에서 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며 적대감을 내려놓고 상대방과 대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게 다가오는 타자, 혹은 타자가 몰고 오는 어떤 사건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면, 우정은 오롯이 내가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이 어느 날 닥쳐온 사건의 선물이라면 우정은 시간의 선물이다. 사랑이 파도라면 우정은 강 물결이다. 진정한 친구란 자주 만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중국의 사상가 이탁오가 <분서>에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조금 더 좋은 삶을 살도록 나아가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나는 정말 좋은 친구를 가진 행복한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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