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길 경기도 230리·평택구간 81리
진위고을의 영화(榮華)가 느껴지는 ‘역사의 현장’

▲ 진위현의 중심이었던 진위면 봉남리 전경
경기 삼남길 제9길 ‘진위고을길’은 야막~갈곶~가곡~봉남~마산~소백치~대백치~도일동~원균 장군 묘까지 이어지는 17.4㎞ 44리 구간으로 과거 평택지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진위현의 영화가 곳곳에 스며있는 여정이다.
특히 지금은 역사 속에 묻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봉남리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진위현의 현청과 객사는 금방이라도 옛 이야기를 토해낼 듯 하고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진위향교와 평택의 젓줄 진위천은 역사의 질곡을 잘 견뎌내며 유유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평택시사신문> 이번호에서는 진위면 가곡1리~봉남리 구간에 이르는 길과 이 길을 걸으면서 만날 수 있는 역사·문화자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사회적 책무를 다한 신가곡 경주 이 씨 가문
무봉산 서편자락에 자리 잡은 가곡1리 신가곡은 마을의 산과 골짜기(谷)가 아름답다(佳)고 해서 마을 이름이 ‘가곡리’다.
무봉산과 접한 이 마을과 인근지역은 조선후기 경주 이 씨 상서공파의 집성촌이다. 경주 이 씨는 이성무의 증손 백사 이항복 이후 정승과 판서를 두루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이회영, 이시영을 비롯한 6형제 모두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봉오동·청산리대첩의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의열단과 한국광복군의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가곡리 신가곡 일대는 이회영의 둘째 형이었던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의 터전이다.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내며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이 재산이 양자 이석영에게 상속돼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됐다. 그 때 신가곡 일대의 토지도 매매되어 독립운동자금이 됐다. 현재 마을 안에는 이석영의 조부 이계조의 묘와 경주 이 씨 재실이 있고 무봉산 일대에는 경주 이 씨 종산(宗山)이 남아있다.

 
■ 진위현의 영화, 지금은 사라진 진위관아 터
진위면 봉남리는 조선시대 진위현의 읍치(邑治)로 조선 초기 충청도에 속했다가 1398년(태조 7년) 경기도 관할로 옮겨졌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개편으로 진위군의 중심지역이 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부선 평택역을 중심으로 근대 도시가 발달하고 군청이 평택역 부근으로 옮겨가면서 읍치였던 봉남리의 쇠퇴가 시작됐다. 1938년 10월 진위군의 명칭이 ‘평택군’으로 바뀌면서 평택군 북면 면소재지가 되었으나 옛 위상을 살리기 위해 1949년에 북면을 진위면으로 바꾼 뒤 오늘에 이른다. 봉남리의 진위관아 터는 진위면사무소와 진위초등학교 자리로 관아의 동쪽에는 객사가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면사무소에서 동쪽 500m에는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인 진위향교가 있었다. 또 관아의 남쪽에는 읍내장과 주막거리가 있었다. ‘진위주막’은 삼남대로의 요지이고 수원에서 하루 낮 거리여서 많은 여행자들이 쉬어갔다.

■ 쇠퇴해가는 남사당을 일으킨 유세기 선생
웃다리농악을 대표하는 농악은 바로 ‘평택농악’이며 평택농악의 근원에 남사당이 있고 진위면 봉남리가 남사당패를 흥하게 했던 유세기 선생의 고향이다.
봉남리 출신 유세기(1893~1983)는 조선후기 전국 5대 놀이패인 진위패를 육성한 가문으로 농악과 시조 등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그가 농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친의 영향이 컸다. 유세기의 부친은 진위현 관청에 딸린 관리인 아전이면서 솥을 만들어 파는 솥전을 대대적으로 경영했는데 전국에서 농악에 소질 있는 사람들을 종업원으로 불러 모아 평소에 농악을 연마시켜서 1867년 고종 4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자 경복궁 건축 위안공연에서 대원군으로부터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都大房旗)’라는 농기와 3색의 어깨띠를 하사받았다. 당시 상쇠 김덕일에게 ‘오위장(五衛將)’이란 벼슬을 내려준 사실이 있다. 그 당시에는 진위농악이 경기농악을 대표할만한 실력이 있었고, 전국에서도 가장 명성을 떨쳤던 존재였다.
일제강점기 초 일제는 한국 전통문화 말살 정책과 함께 국민 결속을 다질 수 있다는 이유로 경찰서의 허가를 얻어야만 남사당놀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전국적으로 남사당놀이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성경찰서 경부로 몸담았던 유세기 선생은 유일하게 남사당패를 허가해줬다. 이 같은 이유로 전국의 남사당패들은 안성지역에 집중 이주하게 됐으며 이 때문에 평택과 안성은 남사당패의 중심지가 됐던 것이다.

▲ 영의정을 지낸 비운의 정치가 심순택 묘
■ 영의정 심순택과 ‘금릉학원(金綾學院)’ 구택희
봉남리에는 구한말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沈舜澤 1824~1906)과 사설학원인 ‘금릉학원’을 세운 정경부인(貞敬夫人) 구택희(具澤喜) 씨의 자취가 남아있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1884년 우의정을 역임하고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온건개혁파의 중심인물로 사대당(事大黨) 내각의 영의정을 맡는 등 혼란기에 관직에 나아간 심순택(1824∼1906)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 무효의 상소를 올렸으며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고뇌, 국운과 함께 하다가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봉남리에는 심순택의 묘와 동물상·문석인·석등이 있으며, 묘 동쪽 아래에는 부인 구택희 씨가 살던 고택이 남아있다.
심순택의 부인 구택희 씨는 남편의 묘가 있는 봉남리에 옮겨와 살면서 매년 봄 궁핍했던 시기(春窮期)나 명절이 되면 쌀 등 기타 물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또 배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1912년 학원을 설립하고 ‘구씨학원’이라 칭했다. 처음 2년제였다가 4년제가 되고 명칭도 뒤에는 ‘금릉학원(金綾學院)’으로 개칭했다. 구택희 씨가 타계하자 아들이 학원을 계승해 해방이 될 때까지 유지하다 자연 폐교가 되고 재학생들은 1899년 세운 인근 진위국민학교에 편입됐다.

■ ‘배산임수’로 명당 중의 명당 ‘진위향교’
진위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불에 탔다. 1889년(고종 26)에 전면적인 개보수를 실시했고 1987년 동·서재를 중건했으며 2007년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해 오늘에 이른다. 진위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27명의 성현의 위패를 모셨다. 유림에서 매년 봄과 가을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
진위향교는 산줄기가 좌우로 팔을 벌린 형상의 오목한 산기슭 경사면에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으로 남쪽을 향해 건립돼 있다.
진위향교는 풍수의 기본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충실히 따른  명당으로 전국 향교 중 으뜸인 풍수지리로 유명하다.

■ 오랜 세월 지켜온 마을숲 ‘진위 관방제림’
평택의 젖줄인 진위천은 용인시 이동면 부아산에서 시작해 진위현 옛 고을인 봉남리를 지나 서탄면 금암리에서 오산천과, 서탄면 회화리에서 황구지천과, 고덕면 동고리에서 안성천과 만나 평택호로 모아져 경기만으로 흐른다.
조선 후기 만들어진 진위현 지도들을 살펴보면 지금의 진위면 봉남리인 읍내면 향교동 앞에 흐르는 장호천을 따라 5Km에 이르는 제방에 큰 버드나무 군락이 기록돼 있다. 지도에 관방제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방제림은 중앙이나 지방정부에서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제방에 조성하는 숲으로 장호천 관방제림은 적어도 1700년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지도상으로는 나무의 수종이 버드나무로 보이며 수령도 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조선시대 군현지도에서는 나무 군락을 자세하게 표현한 지도를 보기가 드물어 진위현 관방제림의 역사나 규모를 가늠케 한다.
1960~80년대까지만 해도 진위천 제방에는 오래된 버드나무와 느티나무가 백여 그루 이상 남아있어 여름철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됐다. 최근 들어서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역사·생태환경 자원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 풍광이 뛰어난 진위향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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