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그리울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일시에 적막에 들고 오직 풀벌레와 새 소리, 별들의 고요한 움직임만 남아있는 섬…. 

자동차 소음, 텔레비전 소음 등 사람이 문명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낸 대부분은 소음을 동반한다. 사람의 말도 그에 버금가는 소음으로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침묵이 지닌 위대함을 되새겨보곤 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저작 <침묵의 세계>를 오래전에 내 방식대로 읽었다. 막스 피카르트 의사였고, 글을 썼으며, 1965년 생을 마감했다. 그가 쓴 책을 통해 침묵의 힘을 새롭게 접한 후부터 이상하게 사람의 언어가 갈수록 공허하게 느껴지곤 했다. 

“침묵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침묵의 세계성에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反響)인 것이다.” -위의 책 29p

막스 피카르트는 인간이 언어를 침묵으로부터 분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언어를 고아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더 이상 모어(母語)가 아니다. 진정한 언어는 침묵과 함께일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침묵은 또 하나의 언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를 배웠고 그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싫고 좋은 것, 사랑하거나 싫어하는 표현도 언어를 통해야만 가능해진다. 그러나 ‘침묵’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누군가와 다투고 난 후 상대방이 입을 꾹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다. 그때 상대방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침묵’이라는 언어이다. 언어는 본인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하는 것인데 침묵이 또 하나의 언어라면 상대방은 침묵을 통해 어떤 의사를 전하고 있을까. 상대방이 입을 닫고 침묵하는 순간부터 나에게는 상대방이 직접 전하는 말보다 더 많은 언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때로는 ‘내가 화가 났다’는 의사 표현에서부터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까지, 혹은 ‘넌 그때 왜 그렇게 말을 했느냐’는 질책의 표현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의사 표현들이 전해진다. 물론 이 말은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정작 상대방은 침묵하고 있는데 그가 침묵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게 전해지는 말들은 직접 전한 것보다 훨씬 크고 무겁다. 즉, 침묵이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대방이 내게 더 많은 말을 건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침묵’이 가진 힘이다. 

선조들은 이러한 침묵의 힘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사랑한다는 말로 직접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그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말없이 슬쩍 전해주었다. 따스함이 듬뿍 담긴 눈빛까지 더해진다면 선물을 전해 받은 사람은 상대방이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음에도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일까. 막스 피카르트는 사랑 속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침묵을 증가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만은 침묵의 기원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랑은 우리 내부를 충만한 영혼의 침묵으로 채우면서 그 외의 어떤 소음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볼 때 침묵 외의 어떤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모든 영혼이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닌가. 

다행히 아직 침묵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시를 쓰는 자들이다. 시인들은 시에서 자신의 특별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침묵’을 적절히 잘 활용한다. 시인과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현대사회의 소음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침묵과 공존한다. 단어와 단어의 연결을 통해, 혹은 행과 행, 연과 연의 구분을 통해 침묵을 활용한다. 시인들은 침묵 속의 사랑을, 사랑 속의 침묵을 시로 옮겨 적는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는 침묵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너무 많은 소음 속에서 침묵은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는 듯하다. 말하는 자와 침묵하는 자의 구별도 사라지고 그 자리엔 다만 말하는 사람과 말하지 않은 사람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침묵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침묵이 끼어들 틈은 아예 없어 보인다. 어쩌면 침묵을 두려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만일 침묵으로 맞이하는 아침이라면 그 시간에는 더 깊고 풍성한 침묵의 언어들이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새들의 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낮은 숨소리, 강아지의 하품 소리, 어쩌면 풀잎이 스러지거나 강물이 흐르는 소리, 태양이 사물들을 깨우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침묵을 잃어가는 속도만큼, 유령 같은 소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침묵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진짜 언어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들로부터 얻어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로지 더 발달한 문명만을 향해가려는 몸부림으로 우리의 삶은 오히려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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