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평택농악 보유자 지정
2001~2019년 보존회장 역임

 

“평택농악 발전을 위해 서로 양보하고 화합해야 합니다”

 

우여곡절의 유년기

김용래(84세) 평택농악 보유자는 천안군 화성읍 쌍용동 299번지에서 삼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네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읜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일찍이 힘겨운 삶을 마주해야 했다.

“아버지는 사금 채취장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이 사실도 생전 아버지와 알고 지냈던 이돌천 아저씨에게 전해 들었죠”

강릉김씨 한 계파의 6대 종손으로, 전주이씨 집안과 마을의 중심을 이뤘던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원래 집터도 넓고 작은 논도 몇 마지기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국민학교도 입학만 하고 가질 못했죠. 해방 후 가족이 된 새아버지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지자 쌀 세 가마니를 받고 집을 팔아버렸어요”

오갈 곳이 없어진 김용래 명인의 가족은 새아버지를 따라 군산에 정착했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자 다시 올라와 천안 용곡동에 정착했다.

“명확한 거주지도 없이 남의 집에서 겨우 잠만 자곤 했어요. 채소를 캐서 장에 가서 팔곤 했는데, 그때의 고생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남동생도 채소를 먹고 탈이 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새아버지도 제가 열다섯 때쯤 돌아가셨죠”

 

농악에 빠져들다

김용래 명인은 열 살 무렵, 쌍용동에 살던 시절 처음 난장패를 접했다. 

“마을 앞산을 넘어가면 난장이 있었습니다. 그 소리만 들어도 너무 좋았어요. 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니, 심심하면 가서 구경했습니다. 당시에는 돈을 내야 했는데, 가마니로 친 울타리 사이를 몰래 비집고 들어가 구경하다가 혼이 나기도 했죠”

그는 열세 살에 외갓집 친척 어른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난장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먼 친척 형부 되는 분이 난장에서 북을 치셨어요. 어려운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게 난장에 나와 밥이라도 얻어먹으라고 말씀하셨죠”

열세 살이지만, 또래보다 체구가 작아 사미로 시작한 김용래 명인은 어른들의 어깨 위를 오를 때마다 무서우면서도 또 다른 희열을 느꼈다.

“사미로 오를 때면 높은 담벼락도 저 아래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무서웠죠. 그래도 즐거웠어요.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제 밥벌이는 했으니까요”

그는 열네 살에 안성 공도소방서 걸립에 참여한 뒤 열여섯 살에 최은창 명인을 만나 걸립패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습니다. 이돌천 아저씨도 걸립하러 다니면서 알게 됐죠. 걸립이 있으면 항상 동네 이장댁으로 전화해 제게 연락하곤 했어요”

 

평택농악을 보존하다

어깨너머로 농악을 배운 김용래 명인은 달밤에 잠든 선배의 상모를 몰래 들고나와 연습한 노력 끝에 열여덟에 처음 상모를 썼다.

열일곱부터 남사당에 참여해 평택지역과 인연을 쌓은 그는 인천 대성농악단, 한국민속촌 농악단, 천안시립 흥타령풍물단 등 여러 농악패에서 활동한 뒤 1985년 평택농악에 합류했다.

“남사당에서 오래 활동했지만, 외부인이었기에 중심이 되기엔 힘들었어요. 이후 평택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적을 뒀죠. 1987년 마흔아홉 살에 평택농악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받았습니다”

김용래 명인은 2000년 8월 22일 평택농악의 최고 권위자인 ‘보유자’로 지정됐다.

“1990년 보유자 후보로 지정된 이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보유자가 됐습니다. 이때 평택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고 있죠”

그는 보유자로 지정된 뒤 2001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18년간 보존회장으로서 평택농악보존회를 이끌었다.

“무동놀이가 모두 사라져 직접 복원에 나섰어요. 노력 끝에 여덟 가지를 복원해 대중에 선보일 수 있었죠”

김용래 명인은 다른 농악보존회와 힘을 합쳐 농악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평택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의 대표목록으로 등재된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해 2014년 11월 28일 등재된 뒤 이튿날 경복궁 앞에서 기념공연을 선보였는데, 이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그는 농악단체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특히,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는 김용래 명인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각자도생하기보다는 양보하고 화합해 똘똘 뭉쳐야 한다고 말한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 한 발짝 물러서 더 나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용래 명인의 바람대로 평택농악이 현재 처한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지역의 자긍심이 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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